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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0
[알기 쉬운 전공 에세이] 우리나라 공기부양선 40년사 (2/3)
<글 :  ㈜우리해양기술 김상근 부사장  Sgkim5280@wooriocean.com>

-'우리나라 공기부양선 40년사'는 2020년 2월호 웹진부터 세 번에 걸쳐 연재됩니다.-


 III. Hovercraft 개발 및 건조

1983년 겨울부터 현재까지의 기간으로, 한진중공업에서는 SES 개발과 병행하여, 선박으로서는 가장 빠른 선형인, Hovercraft의 개발에 몰두하여 12M급 Hovercraft 1척, 14M급 Hovercraft 4척, 25M급 군용 Hovercraft (LSF-I) 1척, 그리고 27M급 군용 Hovercraft (LSF-II) 8척 건조 (2척 인도, 6척 건조 중), 그리고 27M급 군용 Hovercraft 개량형(LSF-II Batch II)을 개념설계 하는 등 세계적인 Hovercraft 강국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세계적으로 군용 Hovercraft를 자체 건조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 러시아, 한국, 영국, 핀란드의 5개국에 불과하다.

1. 8M급 hovercraft 시험선 (TURT-3) 개발
8M급 Hovercraft 시험선인 TURT-3의 건조는 과기처자금으로 79년 1월 시작되었으며 18M급 SES 개발사업 및 장비 구입의 애로로 81년 2월에 종료되었다.

1) 설계 및 제작
TURT-3는 개발팀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주기관 (Gasoline engine)을 구입하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 보았지만 개발팀의 특별한 요구와 수량이 한 대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주문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큰 난관에 봉착하여 돌파구를 찾기 위한 고심 끝에 TURT-2 (8M SES 시험선)에 사용한 선외 엔진(150HP)을 개조하자는 안이 제시 되었으며 달리 대안이 없어 선외 엔진을 개조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존의 추진기 (Water Propeller) 대신 항공기용 추진기를 사용해야 하므로 선외 엔진을 180° 돌려 상하를 거꾸로 하고, 구동축을 연장하며, 기존의 해수 냉각방식을 라디에이터 냉각방식으로 개조하였다.
스커트설계는 SES의 경험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선체중량을 줄이고 선폭을 증가시키기 위해 선측에 팽창식 튜브를 설치, 스커트를 팽창식 튜브에 부착하였다. 항공기용 추진기는 서울대 항공공학과에 설계를 의뢰하여 국내에서 제작하였는데, 당시 국내에는 모형 비행기의 추진기 제작이 고작이었다.

2) 시운전
 


<8M급 Hovercraft 시험선>


 주기관은 시운전 도중 소소한 문제가 발생되었지만 시험선으로서는 만족스러운 기능을 다하였으며, 팽창식 튜브는 공기 밀폐가 완벽하지 못하여 2~3일 마다 압축공기를 주입하여야 했다. 항공기용 추진기는 나무로 제작되었는데, 시운전 도중 물보라에 의한 erosion(water spray에 의한 바늘로 찌른 듯한 곰보자국)으로 날개에 균열이 발생하여 개발팀은 자체적으로 날개의 강도를 보강하기 위해 날개 내부에 심을 심고 날개 재질은 나무에서 FRP로 바꾸었다. 나무 보다는 향상되었으나, erosion을 피할 수 없었으며 결국에는 날개가 절단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더 이상의 시운전은 무리라고 판단되어 시운전을 종료되었으나, Hovercraft에 대한 기초적인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2. 12M급 hovercraft (TURT-4) 개발

국내 최초의 Hovercraft는 ADD(국방과학연구소)에서 발주하였으며, 안흥시험장의 해상사격시험장 통제선 용도로 계획하였다. 1983년 12월부터 1985년 1월까지의 기간으로, 그동안 SES의 많은 경험과 8M급 Hovercraft시험선인 TURT-3의 제작을 토대로 국내 최초의 Hovercraft이며 아시아 최초의 디젤기관 추진 Hovercraft인 TURT-4 개발을 위한 새로운 도약이 시도되었다. 막상 시작하니 TURT-3은 장난감에 불과하며, SES와는 차이점이 많아 SES 개발 때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으나 개발팀의 의욕은 충만되어 있었다.


1) 설계 및 건조
독창적인 추진계통 및 부양계통이 구상되었으며 저속시 선회를 위한 공기분사장치인 Puff-Port장치가 적용되었다. 당시 필자의 담당업무는 선형설계분야에서 추진설계분야로 바꾼 상태라 새로운 추진, 부양 System 구상에 골몰하였으며, 또한 필자를 따라다니는 Skirt 설계 그리고 이 사업의 Project Engineer로서 안팎으로 바쁜 역할을 해야 했다.
Hovercraft의 공기역학적 특성을 분석하기 위해 서울대 항공공학과에서 풍동시험을 수행하였고, 스커트는 자체 설계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영국의 설계용역사와 공동으로 진행되어 설계능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얻었다.
이렇게 일에 파묻혀 지내는 사이에 건조작업은 다소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시운전을 앞두게 되었다.

2) 시운전
1984년 11월 시운전 첫날, 선주측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고사를 지내고 장비를 작동시켰다. 모든 장비는 만족스럽게 작동되었으며 부양상태도 양호하여 성공이 눈앞에 다가온 듯 하였다. 시운전 기간은 1985년 1월 말까지 약 2개월 반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시운전 기간 동안 웃지 못할 사연도 많았다.

o 시운전 초기에는 Take-off이 되지 않아 꽤나 고민하였다. SES 시운전에서 터득한 Know-how로도 도저히 해결되지 않아 고생 끝에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한 일
- Hovercraft는 타 선박에 비해 Hump drag이 높으므로, 초기에는 부양상태에 맞추어 출력을 최대로 올려 hump를 빨리 벗어나야 하며, Hump를 벗어나자마자 출력을 줄여서 원하는 속도를 유지하면 된다.
o Take-off 되자마자 어찌나 빨리 가속이 되는지 선거장은 어쩔줄 몰라 급선회하다 수차례 Plow-In (선수 트림의 감소로 선수부의 정면 또는 측면이 물속에 쳐 박히는 현상) 당한 일
o 수차례의 Plow-In으로 혼이 난 선거장은 타 선박의 시운전을 빌미(?)로 본선의 시운전이 계속 지연되자 고심 끝에 선주측의 선장을 설득하여 책임은 회사가 진다는 약조와 함께 시운전을 계속한 일
o 시운전 어느날, 마산항에서 브라보해역으로 항주중 배가 강한 옆바람에 밀려 Yawing된다는 것을 느꼈으나 진해 해군기지의 선박통제를 위해 설치한 부이 (직경 1.5M)와는 거리가 많다고 낙관하였는데, 눈 깜박할 사이에 커다란 부이가 배 앞에 나타났다. 피할 틈도 없이 부이를 향해 돌진하였으며 선장은 추진/부양기관을 모두 정지하였다. 배는 신속히 정지되었으나, 졸지에 당한 처지라 상황을 파악하기에 부산하였다. 이상할 정도로 배는 멀쩡하였으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런 충격도 못 느낀 것 같았다.
배를 움직여 보니, 배 밑에 들어있는 커다란 부이가 배 밖으로 튀어 나왔다. 모든 일이 잘 되었다는 기쁨과 함께, 자항을 시도했지만 부이를 연결하는 Wire Rope에 배 바닥이 걸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십 차례 전,후진을 반복하며 탈출을 시도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용감한 선장의 잠수로 Rope가 Landing Pad (육상 Landing을 위해 선체 바닥에 설치된 받임대)의 가장자리에 걸린 상황을 정확히 관찰하여 탈출에 성공하였다.
앞으로는 이 정도의 장애물은 바로 통과하자는 다짐과 함께.

3) 50 Knot 돌파
가장 기억되는 것은 시운전 마지막 날인 1985년 1월 27일(일요일), 국내 최초로 50노트의 벽을 돌파한 순간이라고 생각된다. 그동안의 시운전 기록으로 미루어 잔잔한 바다(Calm Sea)에서 50노트를 낙관하였으나 겨울철의 일기불순, 조종미숙, 어선의 방해 등으로 계약속력을 확인할 기회가 없었었다. 1월 28일은 현지로 출발하는 인도일이어서 마무리 작업에 바쁜 관계로 그동안의 시운전자료를 토대로 Calm Sea에서 50노트 이상을 충분히 낼 수 있다고 선주측을 설득하였으나 당시 선주측 수석감독관인 송준태박사(전 진해기계창장 역임)는 실제로 계측하여 공인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1월 27일(일요일) 오전에 시운전하고 오후에 마무리 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1월 27일 오전의 해상상태는 파고 0.2M, 풍속 3노트로 겨울날씨로는 드물게 좋은 날씨였다. 시운전 구역인 브라보해역에서 출력을 단계적으로 올려 Mile Post 구간을 수차례 왕복하며 속력을 계측하였다. 최대 출력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마지막 run에서 갑자기 나타난 어선 때문에 급선회하게 되었다. 다시 가속하여 최대속력으로 Mile Post를 통과하여 선회하는 순간, 배가 갑자기 Heeling되는 것을 감지하였다. 급히 감속하여 확인해보니 핑거가 손상(스커트에 취부된 144개 핑거중 1개가 손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운항에는 지장이 없으나 최대 속력을 기록할 수 없으므로 급히 귀항하여 집에서 쉬고 있는 작업자를 불러내어 신속히 보수하였다.
오후 늦게 브라보해역으로 다시 향하였다. 브라보해역에 도착하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으며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파고는 0.3M, 풍속은 6노트로 점차 저기압이 형성되고 있었다. 곧장 최고 속력으로 가속하여 어둠이 깔려 가물거리는 Mile Post를 향해 질주하였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결과는 왕복하여 54.8노트/46.8노트, 평균 50.8노트를 기록하며 국내 최초로 50노트를 돌파하는 순간이었다. 필자를 포함한 시운전팀과 선주측은 모두 뛸듯이 기뻐하였으며 그동안 서로의 노고를 격려하기에 바빴다. 어둠이 짙게 깔린 겨울바다가 퍽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당시 Project Engineer로서 설계 및 사업을 주도적으로 담당한 필자 (당시 과장)은 개발팀을 대표하여 1985년 11월 대한조선학회의 제2회 ‘충무기술상’을 수상하였다. ‘충무기술상’은 1983년 (고)엄도재 제독 (조함단장 역임)께서 울산함 개발 공로로 받은 국방과학장려금을 학회에 기탁하여 만든 상으로 당시 조선학회 최초이며 유일한 상으로 필자는 31세의 어린 나이에 대상을 받아 당시로서는 큰 기쁨이었으나, 이것이 굴레가 되어 현재까지 공기부양선과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1986년 5월 RINA(영국조선학회)가 주최하는 “Warship’86 Symposium”에 TURT-4의 개발 논문 “The Development of the TURT-4 Diesel Powered Amphibious Hovercraft” 을 발표하였다. RINA의 논문 발표는 편당 50분 (발표 20분, 토론 30분)으로 필자의 일천한 경험과 짧은 영어실력으로는 엄청난 도전이었지만 두둑한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로서는 한국조선기술의 태동기로 국제학술대회 발표는 매우 드문 경우로, TURT-4는 아시아 최초의 디젤 추진 Hovercraft로서,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Hovercraft를 개발하였다는 것이 기특(?)하다는 인상과 Hovercraft 설계 건조의 대명사격인 영국의 BHC로부터 따가운 경계를 느낄 수 있었다.

3. 14M급 Hovercraft (TURT-4 MK-II) 개발

TURT-4의 성공으로 보건사회부의 쾌속후송선(Sea Ambulance)으로 채택되어 1987년 1월부터 91년 12월까지 순차적으로 4척의 Hovercraft가 건조되었다.


1) 설계
TURT-4의 개선사항을 대폭 반영한 개량형으로 Single Propulsion에서 Twin Propulsion으로, Single Rudder에서 Multi Rudder로, 2 Puff Port (고정식 공기분사장치로 Bow Thruster와 유사 기능)에서 4 Puff Port로 조종성능을 대폭 보강하였으며, 또한 4척을 순차적으로 건조하면서 지속적인 보완을 이루어 신뢰도 및 내구력 향상에 주력하였다.

2) 시운전 및 운항
TURT-4에 비해 엄청나게 보강되어 회심의 역작으로 기대하였으나 승조원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의 미비로 승조원들이 본선 운용에 적응하는데 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하여 본선의 진가를 발휘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대부분의 승조원들은 일반 저속 관공선에 익숙하였고, 고속선의 경험도 없이 이와 같은 초고속선을 운용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으나 여러 척이 건조되면서 이러한 사항은 많이 해소되었다. 본선은 전남, 경남, 경기 및 충남에 각각 배속되어 도서민들의 긴급 환자수송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2M급 hovercraft(TURT-4)>

 전장X폭X부양높이

12.7mX7.0mX4.7m

 만재중량

 9.6ton

 최대 속력

 55kts

 추진기관

 Diesel 1 x 428hp

 부양기관

 Diesel 1 x 324hp

 승선 인원

 5p

 항속거리(40kts 기준)

200 N.Miles  

 선체재질

 알루미늄 합금

 
 


<14M급 Hovercraft(TURT-4 MK-II)>

 

 전장X폭X부양높이 

13.4mX7.4mX3.9m

 만재중량

 15ton

 최대 속력

 45kts

 추진기관

 Diesel 2 x 340hp

 부양기관

 Diesel 1 x 272hp

 승선 인원

 10p

 항속거리

150 N.Miles  

 선체재질

 알루미늄 합금


4. 25M급 군용 Hovercraft (TURT-5, LSF-I) 개발
LSF(Landing Ship Fast)-I은 우리해군의 고속 수륙양용 공기부양 상륙정으로 TURT-4의 실선화 성공이 촉진제가 되어 사업이 구체화 되었으며, 이성진전무와 필자는 83년부터 서울 대방동(당시 해군본부 위치)을 오르내리며 프로젝트를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쓴 사업으로, 1985년 12월부터 89년 12월까지 4년에 걸쳐 개발 건조되었다. 당시 이 규모의 Hovercraft를 건조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영국, 러시아 3개국에 불과하여 개발팀은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1) 설계 

 ● 설계 및 개발
TURT-4와는 규모, 성능, 계통 등 모든 면에서 비교할 바가 못되었으나 개발팀은 자신감을 갖고 의욕적으로 설계를 착수하였다. 설계는 개념설계, 기본설계, 상세설계로 구분되어 단계적으로 수행되었으며, 체계적인 모형시험(수조시험, 풍동시험, 조종시험, 스커트시험등)은 영국에서 수행되었다. 최소 중량설계, 주추진계통, 회전식 함수추진기, 부양송풍기, 스커트 등 넘어야 높은 산들이 많았으므로 설계 착수와 함께 각 분야별로 집중적인 연구개발을 병행하였다.

o 회전식 함수추진기 (Rotating Bow Thruster) 개발
회전식 함수추진기는 360° 회전하는 공기분사장치로 Mechanic – Hydraulic – Electric – Electronic을 복합한 System으로 Hovercraft의 주 조종수단에 해당되며 공기역학에 대한 전문지식과 정밀 제어를 요하는 복잡한 장치이다. 영국, 미국 등지에서 유사 Hovercraft의 Bow Thruster 제작사를 수배해 보았지만 모두 건조 조선소에서 직접 제작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실적이 없는 업체는 개발비를 포함하여 엄청난 고액을 요구하였다.
결국 자체 제작하기로 결정하였으며 필자가 출장중 유사선에서 촬영한 몇 장의 사진을 바탕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 연구가 진행되어 System을 알면 알수록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Risk를 배제하기 위해 실물크기의 모형을 제작하였으며 각종 시험을 통해 많은 개선점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2년간에 걸친 값진 노력으로 독자적인 함수추진기 설계기술을 확보하였다.
 


<Bow Thruster의 Full Scale Model>

 


<LSF-I>


 o 부양송풍기(부양 Fan) 개발
또한 기존의 부양송풍기의 용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자체적으로 개량형 부양송풍기 개발에 착수하였으며, 시험도중 4 차례의 부양송풍기가 파괴되는 악몽을 감수하여야 했다.
Fan Test는 다량의 공기를 흡입하여 압축된 공기를 배출관을 통해 배출되어 Test Shop에는 A급 태풍이 불게 되므로 시험요원들은 안전에 유의하여 안전모와 작업복이 날리지 않도록 끈으로 꽁꽁 묶고 한 손에는 방패를 들고 Test에 임하였다. 마치 중세기의 기사처럼.
고속으로 회전하는 Fan이 파괴되면 Test Shop은 처참한 광경으로 변하였다.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파편이 도처로 날아가 천정에 커다란 구멍을 곳곳에 만들며 바닥으로 날아간 파편은 바닥에 커다란 상채기를 내며 Fan은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이러한 광경을 4번이나 목격하게 되었으니, 개발요원은 물론 필자 또한 허탈한 심정이었다. 더욱이 4번째 시험중 핵심개발요원은 파편에 머리를 크게 다쳐 긴급 뇌수술을 하였다.
갓 퇴원한 개발요원을 여러 날 간곡히 설득하여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하기로 하였으며 필자는 유사시를 대비하여 외국의 Fan 구입을 몰래 검토하였다. 5번째의 성공과 그 희열! 말로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엄청난 기쁨이었다.

본선의 핵심 장비인 추진 Gas Turbine과 부양 Gas Turbine은 동일 제작사로 선정되어야 마땅하나, 장비선정위원회에서 추진 Gas Turbine은 Lycoming사, 부양 Gas Turbine은 P&WC사로 선정하여 설계, Interface, Integration, 군수지원 등 애로사항이 많았으며 인도 후에도 많은 지적이 따랐다.

● Cockrell 경과의 만남
LSF-I 모형시험 계약을 위해 86년 1월, 이성진전무와 필자는 영국의 남부 도시인 Southampton에 체류하였으며, 계약상담 도중 계약사의 책임자인 Rapson씨는 과거 영국의 Hovercraft 개척 시 Cockrell 경(1950년대에 세계 최초로 Hovercraft를 발명한 전기기술자로 영국 황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999년 90세로 사망)의 조수격으로 Cockrell 경과는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전무는 ‘한국의 Cockrell’인 처지라 卿과의 만남을 희망하였으며, 계약 덕분인지 수일내 Cockrell 경의 집으로 초대되었다. Hovercraft의 원조이며, 영국 귀족의 저택을 상상하여 Southampton 교외의 Hythe로 향하였다. 기대와는 달리 해안가에 위치한 아담한 집으로 안내되었다.
Cockrell 卿 내외의 따뜻한 마중으로 거실로 안내되었는데 거실 겸 서재에는 각종 서적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으며 당시 7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발명왕 답게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필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노부부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며, 공기부양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34년 전 사진을 보니, 두 분 모두 타계하였고 필자는 은퇴를 준비하는 시기인지라 감회가 남다르다.
 


<좌로부터 Cockrell경, 이성진전무, 필자>

 


<공기부양선 출간>


 ● ’空氣浮揚船’ 출간
87년 3월 이성진전무는 당시 이채우이사(전 KMS, 전무)와 共著로 국내 최초의 공기부양선에 관한 기술서적인 ‘空氣浮揚船’ 을 出刊 되었다. 1년 반에 걸친 집필로, 개발팀이 자료 준비를 도왔지만 대부분 이이사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이이사는 필자와의 해외출장 길에서도 원고를 들고 다니며 집필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었다. 이 책은 공기부양선의 입문서로 적합하여 많은 계층에 증정되어 널리 읽혀졌으며 출판비의 대부분은 공저자의 호주머니에서 충당되었다.

2) 건조
작업자들의 정성스러운 손으로 부양 Fan, Bow Thruster, Skirt가 제작되었으며 알루미늄 선체는 신속한 속도로 탑재되었다. 그리고 시운전을 위한 Hover Port (완만한 경사를 이룬 HOVERCRAFT용 육상 선착장)를 마련하기 위해 Yard의 부지를 할애하여 건조공정에 맞추어 포장공사까지 완료되었다.
주추진/부양기관이 탑재되고, 초대형 Aero Propeller (직경:3.6M)가 설치되고, 거대한 치마(Skirt)를 허리에 두르니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건조공정의 마무리 단계에서는 노사분규가 겹쳐 마무리 작업에 애로사항이 심각하였으나 개발팀을 비롯한 현장부서의 관리자들이 직접 작업하며 그리고 노동조합측의 따가운 시선과 때로는 집단인신공격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작업에 열중한 헌신적인 작업자들의 도움으로 시운전에 임할 수 있었다.

3) 시운전
승조원의 교육/훈련과 알찬 시운전을 위한 영국의 Hovercraft 전문 Pilot가 도착하면서 시운전이 시작되었다. 유능한 Pilot 덕분으로 시간의 공백 없이 체계적인 시운전이 진행되었고, 모든 System은 만족스럽게 작동되었으며 다소의 수정사항은 신속히 개선되었다.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Pilot의 지적 사항으로 그는 자신의 본분을 잊고 자기의 풍부한 경험에 비추어 많은 지적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Pilot 덕분에 배는 한층 개선되었다.
시운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설계성능 및 군 요구조건은 모두 만족되었다, 속력 시운전에서는 설계 성능을 초과하여 최대 순간속력 71Knot (131Km/hr)를 기록하였으며, 마산에서 한반도의 토끼꼬리를 지나 포항까지 단 2시간에 주파하여 우수한 내항성능과 초고속을 증명하였다.

4) 운용 및 평가
LSF-I은 개발팀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작품으로 핵심 장비인 Bow Thruster 및 부양 Fan을 토종 기술로 자체 개발하는 등 대부분의 기술을 자체 기술로 해결하며 4년 만에 개발 완료하였다.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엄청난 도약이었으며, 유사선인 미국의 LCAC (Landing Craft Air Cushion)의 경우 시제선(Proto Type)이 나오기까지 19년이 소요되었다. LSF-I은 군 요구조건을 모두 충족하여 적기에 인도되었으나, 아래의 이유로 저평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예정된 후속사업이 불발되어 많은 아픔이 따른 사업으로 기억된다.

- LSF-I : 토종기술로 개발하다 보니 개선사항, 소소한  고장 등이 다소 발생하였다. Gyro의 경우, 수상함용 장비를 설치하였으며, 수상함은 천천히 선회하나 Hovercraft는 몇 초만에 360° 회전하다 보니 Gyro가 따라오지 못하고 오작동하는 경우가 많아 항공기용 Gyro가 적합하였으며, 특히 Bow Thruster의 경우, 좌/우 Bow Thruster의 연동장치에서 개선사항이 발생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시간이 경과되면서 개선사항은 대폭 줄어들었으나 아래의 이유로 함 운용이 중단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였다.
- ILS (군수지원) : 초기의 LSF-I 사업이 2년 지연되었으나 별도의 예산 증액 없이 사업이 진행되다 보니, Spare Part 등 군수지원 비용이 대폭 감액되었다. 당시는 ILS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여 함정 건조가 우선 중요하였다. 함 인도 후 장비 고장에 대해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였으며 부품이 없어 정비하지 못하고 대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부의 함운용 부진에 대한 질책에 대해서는 조선소의 미비사항이 침소봉대되었다.
- Pilot :  Hovercraft는 항공기와 선박의 중간 형태로 Pilot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므로 영국의 전문 Pilot를 초빙하여 해군의 Pilot를 충실히 교육/훈련하였다. 그런데 해군의 Pilot는 위관장교로 2년마다 근무지가 바뀌어 전문 교육/훈련을 받은 1대 Pilot는 함 운용을 잘 하였지만, 2대 Pilot, 3대 Pilot로 가면서 함 운용기량이 급격히 떨어졌다. 특히 부품조달이 안되어 장기간 대기상태에서는 함 운용도 못해 보고 인계/인수되는 사례가 허다하였으며 상부의 함운용 부진에 대한 질책에 대해서는 이 또한 LSF-I의 미비사항이 침소봉대되었다.

새로운 개발선이 제대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조선소의 우수한 성능의 개발선 건조 만으로는 부족하고 Pilot의 운용 기량 그리고 군수지원의 3 박자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