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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조선학회 웹진 February, 2020
[알기 쉬운 전공 에세이] 우리나라 공기부양선 40년사 (1/3)

<글 :  ㈜우리해양기술 김상근 부사장 / Sgkim5280@wooriocean.com>

-'우리나라 공기부양선 40년사'는 세 번에 걸쳐 연재됩니다.-

I. 서 언

우리나라의 공기부양선 개발은 마산에 위치한 코리아타코마 조선(1991년 한진그룹으로 인수되어 한진중공업 마산공장으로 변경, 2007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로 이전, 부지는 성동조선에 매각)에서 1977년 겨울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어언 42년의 시간이 흘렀다.
코리아타코마 조선은 1972년 설립 이후 “우리가 만든 배로 우리 바다 지키자”는 사명으로 고속정, 특수선분야에 있어서 국내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공기부양선 분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값진 연구개발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공기부양선은 쌍동형 공기부양선인 SES(Surface Effect Ship)와 수륙양용 공기부양선인 Hovercraft로 대별되며, 한진중공업은 지난 기간 동안 SES 4종 (총 10척 건조), Hovercraft 4종 (총 14척 건조, 8척 인도 + 6척 건조중)을 자체 기술진의 힘으로 개발하였으며, 그중 군용 고속상륙용 Hovercraft인 LSF-II는 미해군에서도 칭찬하는 세계적인 우수 성능의 군용 고속상륙용 공기부양정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최근 동종선 6척이 건조되고 있다.
1977년 겨울은 필자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시기이기도 하며 초창기 개발팀의 설립요원으로서 그리고 현재까지도 꾸준히 공기부양선 관련 일을 하고 있는 유일한 설립요원으로서 지난 42년의 시간을 되돌아 본다. 그동안의 기간은 끊임없는 도전, 계속되는 시련, 그리고 값진 성취의 연속으로 때로는 무모한 도전도 사양하지 않았으며 개척자의 험로를 자청하여 부단한 집념으로 국내 조선계의 불모지였던 분야를 꽃피우는 값진 업적을 이루었다. 이러한 업적은 그동안 개발사업에 참여하였던 패기만만한 젊은이들의 피와 땀의 결실이라고 생각되며 그동안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II. SES 개발 및 건조

1. 8M급 SES 시험선 (TURT-2) 제작

1) 시작

1977년 12월, 당시 이성진 기술이사 (2004년 작고)는 인도네시아 고속정 수출사업과 관련,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이성진이사는 시애틀 자사요원들과 은퇴한 미국기술자 Gunther옹이 만든 SES에 시승하여 시애틀만을 질주하였고, 특히 이이사는 낚시를 하여 두척(60cm)이 넘는 대형 연어를 낚았다. 대단한 길조로 여겨 다음날, 이성진이사는 Gunther옹과 함께 SES 시험선 제작에 대한 기술지원계약을 체결하면서 공기부양선 개발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코리아 타코마 조선은 자체 설계로 40노트급 인도네시아 알루미늄 고속정 건조사업을 수행중이었다. 40노트급, 알루미늄, CODOG 추진, 미사일 탑재 - 지금에서도 도전적인 사업인데, 당시로서는 모험적인 프로젝트였으나 기술진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었다.

2) 설계 및 제작
선명은 거북선의 슬기를 이어받고자 TURT-2라고 하였으며, Gunther옹이 도착하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선체는 내부합판 + FRP 적층으로, 선수/선미 skirt는 얇은 고무천으로, 그리고 부양실(Cushion Chamber)를 관찰하기 위해 선실바닥에 반구 모양의 투명 프라스틱을 설치하는 등, 시험선 제작은 흥미롭게 진행되었다. 당시 개발팀은 해군기술장교 출신들과 필자를 비롯한 방산 특례 신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당시는 방산업체의 특례보충역제도가 없어 필자는 입사 후 해군기술장교 시험준비에 한창이었는데, 그 해부터 시행되어 10여명의 대학 동기들은 특례 1기로서 공기부양선 개발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3) 시운전
 


<8M급 SES 시험선>


78년 늦여름의 시운전 첫날, 부양기관의 시동과 함께 선체는 서서히 부양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선미에서 엄청난 물보라가 발생하였다. 외자재인 선미 스커트용 fan의 도착이 늦어 그 fan의 역할을 간과하고 fan이 설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체를 부양시키니 선미 스커트가 밀폐기능을 상실하고 선실바닥에 달라붙은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이성진이사의 가정용 fan을 설치하였으나 fan의 압력이 부족하여 상황은 비슷하였다. 이번에는 선미쪽에 중량물을 과다 적재하여 겨우 물보라를 잡으니, 과다한 선미트림으로 선수쪽에서 물보라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선실바닥에 설치한 투명 플라스틱을 통해 부양실을 관찰해보면 초기에는 여러 가지 파도가 많았지만, 점차 잔 파도로 바뀌었다가 hump를 지나면서 부양실 바닥은 거울같이 매끈하게 변하였으며 햇빛을 받을 때는 빛이 산란되어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마치 구겨진 빨랫감이 선수에서 들어오자마자 신속히 다림질되어 선미로 매끈하게 빠져나가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다.
시험선은 40.2 knot를 기록하였으며, 초보자의 많은 시행착오와 해프닝 속에서 SES에 대한 산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2. 18M급 SES의 개발 (5척 건조)

1) 시작
1979년 4월, 18M급 90인승 SES 여객선 2척의 수주는 개발팀에게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8M급 시험선 제작으로 겨우 걸음마를 익힌 상태인지라, 솔직히 개발팀은 계약이 지연되기를 학수고대(?)하였다. 젊은 선주인 세길해운의 박사장은 “ 이 개발선이 실패하면 나는 알거지가 되지만 김국호부장 (전 BV Korea 사장)을 믿고 전권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SES의 첫 개발사업은 개발에 미친(?) 이성진이사와 김국호부장의 합작품으로 시작되었다.

 


2) 설계 및 건조
· Skirt/선형설계
필자에게는 재학시절 공기부양선에 관한 논문을 썼다는 죄(?)로 SKIRT설계와 선형설계가 주어졌다. 공기부양선의 핵심기술인 Skirt를 맡게 된 것은 영광이었으나 시험선과는 판이하게 달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막연하였다.
주위에 열심히 물어보았지만 헛수고 였고, 한달 동안 온갖 해외 논문과 잡지를 뒤졌지만 설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기상천외한 Skirt 도면 2장을 완성하게 되었는데 장장 6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도면을 현장에 출도하였으나 도면해독은 물론 방향감각도 잡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작업 종료 시까지 필자는 현장에 살게 되었다. 대패를 들고 Mold를 직접 만들어보고 Skirt 접착을 위해 여러 가지 접착시험을 하며, 시험도중 접착제에 취하여 가벼운 환각증세를 일으키기도 하며, Skirt는 완성되었다. 또한 3종류의 선형을 구상하여 각각 Lines를 준비하였는데 필자가 습작으로 그린 Lines가 채택되어 실선으로 변하고 있었다.

· 부양 Fan 제작
78년 12월 말, 부양 Fan 제작사인 영국의 ROTAFOIL사가 파산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성진이사의 전폭적인 지원과 김국호부장의 발빠른 행마로 단신 현지로 달려가 파산의 어수선한 분위기와 년말 휴가를 준비하는 영국친구들을 붙잡고 공장의 설비를 인수하는 계약, 제작방법 및 설비사용법 습득, Packing List 작성 등을 신속히 마무리 하였다. 그런데 정작 도착되어야 할 설비가 영국의 트럭노조, 부두노조의 파업, 10.26사태 등으로 근 1년이 지나서야 도착되었다. 장비 설치하랴, Manual 익히랴, 어느 것이 좌측 Mold이고 어느 것이 우측 Mold인지 혼돈되고, 장비의 주파수는 50HZ이고, 그리고 공기는 다가오고 …. 좌충우돌 하며 많은 시행착오 끝에 제품이 생산 되었는데 각종 시험(Balancing Test, Overspeed Test등)결과, 만족스러운 성능을 얻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성공이었다.

3) 시운전 및 운항
시운전 D Day의 출근길은 심판의 날로 초조와 걱정이 앞서는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80년 5월 1일로 기억된다. 전사적인 관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두로 모였으며 부양기관 시동과 함께 부양 Fan이 회전되며 Skirt는 서서히 형상을 갖추며 선체를 조금씩 부양시켰다. 곧 Skirt는 풍만한 몸매를 들어내며 선체를 완전 부양시켰으며, 특히 선수 Skirt는 무척이나 아름답게 펼쳐졌다. 성공이었다. 모두들 뛸듯이 기뻐하였으며 필자로서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속력시운전에서 최대속력 37KNOT를 기록하였으며 37 Knot는 몇 사람을 거치면서 40 Knot로 과대 포장되어 대성공작으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당시의 계약속력은 35 Knot로 개발팀은 35 Knot를 얻기에는 기관출력이 Critical하다고 판단하여 해결책에 고심하였는데 엉뚱하게도 37 Knot라니, 개발팀은 김국호부장으로 부터 칭찬성 꾸중을 들었지만 우리의 저항 추정이 이렇게 빗나가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운전이 진행되면서 시운전 초반의 기쁨은 사라지고 필자를 비롯한 몇몇 요원에게는 고행의 길이 펼쳐졌다. Skirt는 시도 때도 없이 찢어지고, Sea Chest에서는 Air Bubble이 흡입되어 Engine이 과열되고, 부양 Fan을 돌리는 Toothed Belt는 계속 절단되고 ……한마디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추진기관에 장착된 Injector가 타용도의 Injector임이 밝혀졌다. 본선의 Engine은 Intermittent Rating인데 제작사의 착오로 Maximum Rating 의 Injector가 장착되어 Engine 출력이 증가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Injector를 교체하고 계약속력을 만족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이 동원되었다. Skirt의 경우, 필자가 작성한 Skirt 손상 보고서만으로도 방대한 분량이 되었으며 이러한 손상을 완전히 해결하는데 2년이란 기간이 더 소요되었다. 18M급 SES의 개발은 당시의 기술수준에서는 대단한 성공작이었으나 많은 지적과 껍질을 깨는 아픔이 따랐다.


4) 18M급 SES 양산
1980년 여름, 국내 처음으로 소개된 18M급 SES의 취항은 많은 인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부산-거제를 50분만에 주파하여 연안여객 수송의 변화를 이루었으나 잦은 고장으로 경쟁사들은 혹평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면서 비교적 안정된 운항을 할 수 있었으며, 연료절감선박으로 일반선 대비 엄청난 경제성이 입증되자 개발선을 주문한 세길해운과 거제해운은 연안여객선사의 선두적인 위치로 부상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1980년 가을부터 동종선에 대한 주문이 밀려와 3척의 동종선이 추가로 건조되어 공기부양선의 전망을 밝게 하였다.
그 동안 개발선에서 도출된 문제점들을 집중적으로 보완하여 신뢰성을 향상시켰으며, 특히 스커트는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내구력 향상에 치중하였다. 상기 동종선은 1981년에 2척, 82년에 1척이 인도되었으며 향상된 성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3. 27M급 200인승 SES의 개발 (3척 건조)

대형 SES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982년 초부터 전장 23.5M, 승객 156인승 SES에 대한 기본설계를 착수하였으며 당시 거제지역의 수송인원 급증으로 1982년 말 영광개발로부터 2척, 코리아 타코마조선의 자사 운항사업용으로 1척, 총 3척이 계약되었으며 1983년 말에 개발사업이 완료되었다.

1) 설계 및 건조
그동안 18M급 SES에서 고생을 많이 한 덕분에 본 사업의 설계건조는 큰 어려움이 없이 진행되었으며, 1호정(영광1호)은 1983년 8월 말 시운전과 각종 성능시험을 거쳐 선주에게 무난히 인도되었다. 18M급 SES에 비해 모든 면이 향상되었으며, 설계 성능이 모두 만족되어 개발팀의 자부심은 대단하였으며 나머지 2척도 마지막 단계여서 무지개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2) 선체 연장
그런데 1983년 9월.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 영광1호의 부산-거제항로 취항 후, 선주측은 수송인원의 폭증 (당시 대우조선의 활황)과 파고 3M일 경우 배수량 선박은 운항되나 SES는 결항됨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은 수정을 고집스럽게 요구하였다.
O 여객정원 200명, 선원 10명 / O 파고 3M에서도 전천 후 운항가능
그리고 이러한 수정이 안될 경우 2호정의 인수를 재고하겠다는 태도였다. 계약사양에 충족되며 더구나 시운전이 임박한 상태에서 이런 터무니 없는 요구를 ---.   김국호부장을 비롯한 개발팀은 이러한 요구는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현상태에서 내파성을 개선시키자고 결론지었다. 수차례의 회의를 거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도출되어 현실적인 몇 가지 방안으로 압축되었다. 이러한 방안이 총책임자인 이성진전무 (상무를 거쳐 전무로 승진)에게 보고 되었으나 이전무의 결심은 가히 폭탄선언이었다. “이러한 방안은 소극적이며, 선체 길이를 증가시키는 것이 적극적이다. 이번 기회에 선체 길이를 증가시키며 얼마를 증가시켜야 될지를 검토하라”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하였다. 내일 모레면 진수하고 시운전 할 배를 ---. 개발팀은 지혜를 모아 여러 차례 이전무를 설득하였으나 허사였다. 결국 이전무는 개발팀의 설득작전 및 현장의 거센 반대를 무릎쓰고 직접 진두 지휘하며 도면 독촉, 현장작업을 독려하여 2척의 배는 개조되었다. 주기관이 선체 중앙에 위치하여 중앙을 절단하기에는 무리여서 선수부를 절단하고 연장될 선수부를 다시 제작하였다. 또한 이러한 작업중 필자가 고안한 선수스커트 개선 및 부양기관의 폐기관 개선 등이 시도되어 양호한 효과를 보여 특허로 출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2호정은 4M 연장된 27.5M (200인승), 3호정은 3M 연장된 26.5M (156인승)로 각각 개조되었다.
당시 국내 연안여객선사의 여건을 부연하면, 18M급 SES의 취항으로 SES는 일반선을 운항하고 있는 경쟁사들의 관심과 질시를 독점하여 조그만 문제가 발생하여도 확대 해석되는 일이 많았었다. 특히 내파성 문제는 경쟁사들이 즐겨 애용하는 비난의 화살로 내파성은 배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으로 초기의 SES개발이 소형으로 시작되다 보니 이러한 비판이 높았었다.
이 전무의 이러한 용단은 SES의 내파성에 대한 시비를 종식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출로 결국 27M급 SES의 출현으로 내파성 문제에 대한 시비는 사라졌으며 타코마 3호는 여수-거문도 항로에 취항하여 우수한 내파성을 증명하였다.
당시 담당임원인 고성윤이사 (수년전 작고, 김국호부장은 대우조선으로 이직)는 공기부양선의 외형적인 발전과 내적인 기술축적을 병행하였으며, SES의 개발 공로로 1983년 말에 제3회 기술진흥 확대회의에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다.


4. 내수면 SES (ACBR) 개발 (2척 건조)

1) 12M급 SES(ACBR)의 개발
·  설계
1982년, 호수와 강과 같은 내수면 전용을 위한 개발사업으로 선정된 ACBR(Air Cushion Bus River)은 소요마력을 줄이고 수송효율을 향상시켜 경쟁성을 극대화한 SES 선종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특징으로 부양높이를 최소화하여 추진장치로 Inboard Out Drive를 채택하였으며, 선미의 기관실을 대폭 줄여 12M의 선체 길이에 56명의 승객수송이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승객의 유무에 따른 과다한 선수 트림을 개선하기 위해 선수 스커트는 더블스커트 시스템을 채택하였으며 내수면 용도임을 고려하여 스커트는 1단으로 단순화 하였으며, 또한 배의 최대 폭은 완성상태에서 육로로 수송이 가능하도록 결정하였다.  

·  시운전 및 운항
선체는 순조롭게 건조되어 시운전을 수행하는 첫날이었다. 험프 저항(Hump Drag)을 쉽게이겨내고 쾌속으로 질주해야 할 배가 계속 Hump에 걸려 허우적거렸다. 개발팀이 총동원하여 원인을 분석하고 처방을 내린 결과 다소 개선되었으나 4전 1기 (4번 시도하면 1번 Take – Off됨)였으며 Take – Off만 되면 쾌속으로 질주하여 계약속력을 충분히 상회하였다. 파도의 진행방향, 추진속력, 그리고 부양상태의 최적 조화에서는 어렵지 않게 험프를 넘었으나 이러한 최적조건을 찾느라 고심하였다.
이 배는 바다가 아닌 내수전용으로 거울같이 잔잔한 소양호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낙관론과 선주측의 실선투입 시기가 맞물려 ACBR은 인도시기에 맞추어 현지로 육로수송 되었다. 강원도내의 많은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취항식 및 시승식이 거행되었다. ACBR은 소양호에 첫 몸을 담구면서 많은 관심 속에 시승식을 가졌는데 개발팀의 낙관과는 달리 여전히 4전 1기, 3전 1기 였다. 험프 속력만 넘으며 미끌어지 듯이 쾌속 질주를 하였지만, 개발팀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실추되는 순간이었다. 그 후 ACBR은 체계적인 재검토와 수정방안을 수립하여 대규모의 수리팀을 현지로 파견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였다. 많은 교훈을 얻은 사업이라 생각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선거장은 70% 부양된 상태에서 추진 Engine Throttle을 단계적으로 조금씩 올려서 험프를 넘을려고 하였고 이 경우, 험프에서 일진일퇴하는 꼴로 선수 파도를 잘 타면 Take Off되고 선수 파도를 못 타면 실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이러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90% ~ 100% 부양상태에서 추진 Engine Throttle은 신속히 100%로 올려 험프를 넘은 다음, 추진 Engine Throttle을 천천히 낮추어 원하는 속력으로 유지하면 될걸.

2) 16M급 SES(N-ACBR)의 개발
·  설계 및 건조
ACBR의 선주인 동부고속의 후속선으로 ACBR의 장점과 18M SES의 장점을 조합한 N-ACBR은 1987년 11월부터 1988년 8월까지 진행되었다.
당시 개발팀은 군용 Hovercraft인 LSF-I개발에 몰두하여 N-ACBR의 설계는 대부분 과외로 진행되었다. 그동안의 축척된 경험으로 설계는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건조 또한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본선은 88올림픽 성화봉송선으로 지정되어 작업자들은 올림픽 준비에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작업에 정성을 다하였다.


 · 시운전
88 올림픽 성화봉송 일정에 맞추기 위해 인도일정이 앞당겨지게 되어 시운전기간이 단축되었다. 개발팀으로서는 이제 SES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고 매사를 낙관하여 단축된 시운전 일정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시운전 초기부터 Sea Chest로 공기유입, 선미 트림의 과다, 기관의 과부하, 속력 미달 등 과거 ACBR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필자는 해결사로 투입되어 밤새 설계도면 및 보고서를 검토 후 어렵지 않게 원인을 찾을 수 있었지만, 수정작업은 일정에 쫓겨 철야로 진행되었다. 다행히 시운전 결과는 만족스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으며, 결국 하루 늦게 인도되었으나 성화봉송 임무에는 지장이 없었다. 냉수를 급히 먹다 체한 기분이었다.
 

<16M급 SES(N-ACBR)> 


 전장X폭X높이 

 17.3mX5.0mX1.2m

 만재중량

 22ton

 최대 속력

 30kts

 추진기관

 Diesel 2 x 292hp

 부양기관

 Diesel 1 x 170hp

 여객 정원

 72p

 선체재질

 알루미늄 합금


<18M급 90인승 SES> 

 

 전장X폭X높이 

18.1mX7.4mX2.0m

 만재중량

 40ton

 최대 속력

 35kts

 추진기관

 Diesel 2 x 510hp

 부양기관

 Diesel 1 x 260hp

 여객 정원

 90p

 항속거리

150 N.Miles  

 선체재질

 알루미늄 합금


<27M급 200인승 SES> 


 전장X폭X높이 

27.5mX10.2mX2.7m

 만재중량

 66ton

 최대 속력

 31kts

 추진기관

 Diesel 2 x 1,010hp

 부양기관

Diesel 1 x 510hp

 여객 정원

 200p

 항속거리

250 N.Miles  

 선체재질

 알루미늄 합금



5. 타사 SES 개발 및 후기

1) (주)세모
㈜세모는 한강유람선으로 시작하여 연안여객선사로 성장하였다. 1991년 노르웨이에서 건조된 40M급 SES 페레스트로이카호 (선체 : FRP sandwich)를 인수하여 부산-거제 항로에 투입하였다.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호를 기반으로 자사에서 동형선 데모크라시1호 (92년 10월), 2호 (94년), 3호 (94년), 5호 (94년)를 순차적으로 건조하여 연안여객선사의 강자, 고속정 건조 조선소로 부상하였으나 연이은 화재, 충돌사고 등으로 불운이 겹쳤으며 청해진해운으로 인수된 후, 세월호 사건의 영향으로 사운이 다하였다.
당시 FRP Sandwich 소재는 선체 경량화에 유리하여 초고속선의 새로운 선체 재질로 조명되었으나, Delamination (박리현상, FRP skin이 벽지처럼 계속 벗겨지는 현상) 및 내화성이 부족하여 화재시 전소되는 문제 등으로 요즘은 CFRP sandwich 소재가 각광을 받고 있으며, CFRP Sandwich의 경우 알루미늄 대비 약 30% 중량 절감이 가능하다.

2) 삼성중공업
1990년대는 국내 조선계에 조선 4사(현대, 대우, 삼성, 한진)를 중심으로 초고속정 개발의 바람이 불어 Catamaran, SES, WIG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으며 현대는 Foil Assisted Catamaran, 대우는 Catamaran, 삼성은 SES, 한진은 WIG 연구개발에 집중하였으며 매년 초고속정 워크숍을 개최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울릉도, 제주도, 흑산도에서도 선상 워크숍을 개최하였다. 삼성은 영국의 설계용역으로 1994년 5월, 37M급 SES 동양골드호(FRP sandwich, 350인승, 최대 45노트)를 건조하였다.

3) 후기
최근 SES는 연안여객선으로는 쇠퇴되었으며 그 원인은 아래와 같이 생각된다.
가) SES는 RCS(Ride Control System)이 개발로 내파성이 개선되어 고속 연안여객선의 강자로 부상되었지만, 부양계통 및 Skirt로 인한 보수유지비가 증가되어 영세 연안여객선사로는 어려움이 많았으며 또한 여객운임의 제한으로 운영에 애로가 많았다.
나) 당시 거제도는 조선경기의 활황으로 유입인구, 유동인구의 폭증으로 연안여객선의 황금시장이었으며 주말에는 승선표를 구하기 위해 전쟁이었다. 하지만 국내 경제가 고도 성장하며 거제도를 비롯한 도서지역들에 연육교가 가설되며 SES를 비롯한 고속 연안여객선은 쇠퇴하였다.
다) ㈜세모의 경우, SES 전문 조선소 및 연안여객선사의 강자로 부상하였으나, SES 여객선의 화재, 충돌의 불운과 정해진해운으로의 인수 등으로 SES의 쇠퇴는 앞당겨졌다.
라) Catamaran, WPC(Wave Piercing Catamaran)은 선형개발 및 성능개선으로 고속화 실현되어 SES에 비해 보수유지비 절감의 장점으로 SES의 자리를 대체하여 연안여객선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