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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20
[산업 현장 이야기] 죽음의 계곡에 입장료 내고 들어온 소감

 <글 : BTS Tank Tech 정태영 대표 betnom@gmail.com>
 
변변한 매출 없이 꾸역꾸역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필자에게 스타트업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시니 정말 난감했다. “기왕이면 이미 괘도에 오르신 조선 분야 스타트업 대표님들의 성공 스토리가 좋지 않을까요?” 나름의 저항은 해보았으나 웹진 집필진의 의지는 강했고, 필자는 교수님에게 그동안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다.
 

 
스타트업은 통상 설립한 지 오래되지 않은 신생 벤처기업을 말하는데, 이 분야 투자 관련 서적을 보면 “죽음의 계곡”이라는 다소 살벌한 문구를 찾을 수 있다. 스타트업이 아이디어 단계에서 기술개발 및 신제품 양산까지 가는 동안의 험로를 일컫는 대표적인 말이다. 또 다른 용어로 “다윈의 바다”가 있다. “다윈의 바다”는 악어 및 해파리 떼가 가득해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호주 북부 해변을 말하는데, 신제품 양산에 성공하더라도 시장의 터줏대감들과 경쟁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스타트업의 고충을 의미한다. 소수의 스타트업만이 이런 계곡과 바다를 건너 꿈에 그리는 이상향에 도달한다.

필자는 구조 및 단열 기술의 혁신을 꿈꾸며, 노후를 위해 모아둔 자금을 입장료 삼아 그 계곡에 들어왔다.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해서 2018년 1월에 법인을 세웠으니 계곡 생활도 이제 3년이 다 돼간다. 굳이 평가하자면 이제 계곡의 가장 깊은 밑바닥을 확인한 후, 바다가 보이는 방향을 잡고 몇 발자국 겨우 기어온 정도라 생각된다. 그 과정에서의 단상을 의식의 흐름에 따라 풀어 본다.

“어쩌다 회사 이름이.....?”

하도 질문을 많이 받아서 먼저 설명해 드리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사의 기술 개발과 관련된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당사는 대형 선박 및 건축물에 적용할 수 있는 구조단열재를 개발하고 있다. 구조단열재란 단열 및 구조 성능을 모두 갖고 있어서, 한 번의 시공으로 구조 및 단열 시공을 마칠 수 있는 자재를 말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제품으로는 우리가 편하게 “샌드위치 판넬”로 통칭하는 복합소재가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구조단열재는 중소형 건축물의 외벽 정도에만 사용될 수 있는 수준의 성능을 가지며, 성능 요구치가 높은 중공업 분야에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당사의 원천 기술은, 금속판, 폴리머 및 진공단열재로 구성된 복합구조를 기반으로, 판보강재 없이도 대형 선박이나 대형 건축물의 주요 구조에 적용될 수 있는 강한 구조 성능을 가지면서도 월등한 단열 성능을 가지는 구조단열기술이다.
일례로, 선박 거주구에 적용될 경우, 별도의 판 보강재 없이 약 55~60mm 두께의 단일 패널로 외벽 및 바닥 구조를 대체할 수 있다. 단열 성능은, 폴리우레탄폼 단열재를 160~200mm가량 빈틈없이 도포한 수준이다. 그리고, 별도 내화재 없이도 2시간 내화 성능이 구현된다. 또한, 단열용 마감재가 필요 없고, 유리창은 선행 의장이 된 상태로 납품할 수 있으며, 약 500mm 이상의 추가 공간 확보가 가능하다. 
 

2017년 기술의 초기 개발 당시, 코어가 구조 및 단열 성능의 두 가지 기능을 가진 구조단열재라는 의미로 Bi-cored Thermal Structure (BTS) 기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중의적인 의미로 기존 구조의 한계를 뛰어넘자는 의미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개발한 대상이 대형 LPG Tank였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름이 정해졌다.
이 자리를 빌려, 당사는 그 국제적인 아이돌 그룹과는 전혀 무관하며 그분들의 찬란한 업적과 명성에 수저를 올리려는 불경한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밝히고 싶다. 아울러 2017년 당시 필자의 복고적 음악성향을 반성하며, 그분들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응원한다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다.

“선박용 탱크에 딱 맞겠네요” & “건물에 적용하면 정말 좋겠습니다”

실제로 고객사로부터 정말 많이 듣는 말이다. 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는데 앞의 말은 건설 관계자가 거의 매번 해주시고, 뒤의 의견은 조선소에서 자주 듣는다. 그래도 이분들은 진심으로 정말 감사하다. 오랜 시간 들어주시고 의견도 주시니깐. 진짜 힘 빠지는 건, 될 수 없는 기술을 들고 왔다는 빈정거림과 어떤 논리로도 깨지지 않는 절대적 의심이다. 안내센터부터 시작해서 힘들게 미팅을 잡은 적도 많고, 친구의 사돈 인맥을 동원한 적도 있다. 새벽까지 발표 자료를 만들어 수없이 연습했고, 기대하는 수준도 발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음 검토 기회를 달라는 정도인데,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나 싶다.

하지만, 소개팅도 많이 하다 보면 조금씩 의상과 멘트가 좋아지기 마련이다.
지난 3년 동안 기술 소개를 100번 넘게 하다 보니, 이제는 처음에 못 보던 것도 보이고, 듣고 싶지 않은 얘기도 귀담아들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실제로, 안되는 이유를 듣다 보면, 오히려 시야가 넓어지면서 방향을 잡을 때도 있도 있다. 그러나, 솔직히 이럴 때마다 타이슨의 명언이 필자 머리에 맴돌면서 한 대 맞은 듯 띵~해진다.
 


<출처 : Lean Startup presentation>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주둥이를 한 대 때려 맞기 전까지는….”

페더급과 헤비급의 경기

조선 관련 스타트업이 모두 이런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실제로, 의장설비, 전장장비, 자율운항 등 조선 분야 스타트업은 생각보다 많고 그들은 각자의 무서운 경쟁 상대가 있을 것이다. 다만, 당사와 같이 바꿔야 하는 대상이 선박의 주요 구조재와 단열 방식이라면 조선소의 표준 방식과 충돌하는 상황이 많아진다.

이 경우, 먼저 상대는 교육과 인증서로 단단히 무장 되어 있다. 학교에서 배운 대부분의 공학 지식은 기존에 쓰고 있는 산업 표준 기술 기반이다. 사고의 기반과는 전혀 다른 파괴적인 신기술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생길 때가 많다. 그리고, 모든 인증을 위한 시험 방식이나 통과 기준은 표준 기술 기반으로 짜여 있다. 당사의 경우, 시료 정의부터 막혀서 기술위원회를 힘겹게 구성해야만 통과될 경우가 많다.

또한, 상대는 어마어마한 대규모 설비와 인프라라는 지원군이 있다. 조선소에는 대용량으로 생산해서 낮은 원가로 살 수 있는 원자재와 자동화 설비가 널려 있고, 관련 인프라도 엄청나다. 반면, 신기술의 경우 이러한 혜택을 기대할 수 없으므로 추가적인 투자 또는 비용 상승효과가 있다.

상대의 또 다른 무기는 오랜 기간 축적된 시행착오이다. 선박은 큰 사고가 있을 때마다 법규가 개정되고 이를 위한 구조가 반영될 수 있다. 반면, 신기술의 경우, 한 번의 시행착오로도 사업이 무산될 수 있다. 설령 살아남아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많은 사람은 그 사고만을 기억하고, 이는 신기술을 거부하는 합리적 근거가 된다.

그리고 상대는 수십 년 동안 마른걸레를 쥐어짜면서 얻어진 최적화의 강점이 있다. 화물창 탱크탑의 두께는 이미 최적화되어 있어서, 엄청난 노력을 해도 2% 경량화도 어려운 경지에 도달했다. 반면, 신기술 구조는 다소 보수적으로 설계될 경우가 많으며 최적화 기회도 적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느끼는 어려움은 표준 기술 대비 신기술에 대한 매우 높은 기대치이다. 앞서 표준 방식 탱크탑의 경우 2% 경량 설계가 이뤄지면 상당한 성과로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신기술을 도입하려면 10% 원가 절감으로는 잘 안 먹힌다. 이것저것 바꾸느라 번거롭게 고생하는데 그 정도로는 어림없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신기술 도입 시의 장점이 10가지라고 하면, 이 중에서 경제성 평가가 손쉬운 항목들만 고려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머지, 장점은 아예 평가에서 제외되거나 참고 사항 정도로만 평가된다. 이런 평가 방법을 기준으로, 앞서 언급한 체급 차이는 그대로 둔 상태에서, 고객사가 요구하는 경제 효과를 증명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통행권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싸워야 경기에서 이길 수 있을까?

아주 영리하고 기술도 좋아서 필자가 좋아하는 권배용이라는 페더급 종합격투기 선수가 있었다. 이 선수는, 상대가 타격을 잘하면 타격으로 부수고, 레슬링에 강하면 레슬링 기술로 압도하는 걸 즐겼다. 좋다~ 그럼, 우리도 한번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설계를 준비해서 조선소에 제시해 볼까? 그리고, 현재 조선소 생산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법을 도입해서 혁신을 일으켜 볼까?

하지만, 그 선수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이렇게 답했을 것 같다.
“페더급이 헤비급 선수랑 싸우긴 왜 싸웁니까, 형님~ 친하게 잘 지내야지요….”

필자는 조선소의 표준과 최대한 싸우지 않는 것이 생존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소가 사용하는 공법에 그대로 녹아 들어갈 수 있는 공법을 제시할 것이고, 상세 설계는 조선소가 자신에 맞게 직접 하는 것이 최고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거주구 전체에 당사 기술을 적용하자고 하면 조선소 관계자는 도전장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설계 변경이 상대적으로 적고 효용성이 높은 거주구의 전면부 외벽 정도만 제안한다면 다소 번거로워도 고려해 주시지 않을까 소망해 본다.

전략을 이렇게 잡았다면 그다음은 필자 스스로가 조선소 입장에서 가까이할만한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리라. 이때 바로 권배용 선수의 전략이 아주 효과적일 수 있다. BTS 기술의 구조 성능이 궁금하시면, 초대형 LPG 운반선 화물창 구조 전체에 적용해도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리라. BTS 기술의 단열 성능이 알고 싶으시면, 영하 163도를 견디는 LNG Tank와 영하 253도에 노출되는 액체수소 Tank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생산단가도 줄이고 품질도 좋게 할테니, 같이 놀아 주세요~

조선소 주변에는 이미 설계/생산/연구 능력이 출중하고 납품 실적도 갖춘 모범생 친구들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필자처럼 헐벗고 무모한 친구가 의외로 도움 될 때도 있으리라. 단지, 지금 당장 성에 차지 않더라도 바로 단정을 짓지 마시고, 한 번 더 둘러보려는 열린 마음만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

배고픈 계곡 생활을 버틸 수 있는 이유 

 
당사가 생각한 84K급 초대형 LPG선 화물창의 설계 개념은 이렇다; 통상적인 방식은, 별도로 제작된 독립탱크에 단열 시공을 한 후 조선소에서 제작한 선체 내부에 삽입하는 방식이지만, BTS 방식은 선체 내부 자체를 구조단열재로 시공하여 추가 공간을 확보하고 중복되는 선각 부재를 없앤다.
당연히 현실화하려면 넘어야 할 벽들이 너무 너무 많다. 솔직히 필자도 시작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서, 개발 초기에 현대중공업 연구소의 이동주 실장님을 만나 기술소개를 한 후에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았다.
“말 안 해도 아시지요? 정말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래도 같이 해주신다면, 저희도 사활을 걸어보겠습니다.”

힘들고 위험하지만, 가능성을 검토해주시고, 다음 기회를 제공하며, 벽을 넘어갈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추운 계곡 생활을 버틸 수 있다. 실장님의 열정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장님과의 미팅 이후, 정말 많은 일을 조선소 연구소와 설계부에서 해결해 주셨다. 우선, 엄청난 분량의 기술 및 경제성 검토 과정을 마칠 수 있었고, 관련 부서 및 선급을 대상으로 수많은 설득과 협의 과정을 지원해 주신 덕분에 DNV/GL로부터 AIP까지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함께 해주는 든든한 당사의 동료들이 있어서 이 생활도 해볼 만하다. 동료들 모두 고맙지만, 하윤석 팀장이 특히 고맙고 잘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 정도의 걸출한 인재가 옆에 있어 주면 화살이나 총탄 정도는 뚫고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유유자적하게 은퇴 생활을 즐기시던 조선소의 대선배님도 힘을 보태주시기로 하셨고, 생산을 담당하는 직원들의 열정도 대단하다. 우리는 이렇게 회사 안팎의 열정을 별미 삼아 나눠 먹으며 계곡을 지나고 있다. 
 


<출처: 한국조선해양 LPG선 관련 인증>


그리고, 미래에 대한 믿음은 이런 열정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어준다. 지금 선박에서 사용하는 판보강재 구조와 단열 방식 모두 많은 사람의 헌신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개발되어온 좋은 기술이다. 하지만, 오늘과 같은 엄청난 변혁의 시대에서, 선박의 구조 및 단열 방식만 10년 뒤에도 오늘과 반드시 똑같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라도 변화가 있을 것이며, 당사의 기술도 이러한 변화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며 버틴다.

우리는 몇 년 뒤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당신의 기술이 선박에 적용될 일은 없을 겁니다”
 


<Michael Kennedy (1954-2018)>


이 말은 필자의 오래된 지인이 선급과 해운사의 주요 관계자에게서 직접 들은 말이다. 2005년, 필자가 런던에서 선박중개인으로 일하고 있을 때, Michael Kennedy씨를 만났다. 혁신적인 복합소재를 대형 선박에 적용하고 싶으니 사업 모델을 검토해달라는 의뢰였다. 창피하지만, 필자도 첫 만남 때 이 기술이 안되는 이유를 매우 분석적으로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이분의 내공은 필자와는 비교가 안 됐다. 어느 순간부터 필자는 Kennedy씨의 영국회사와 한국 조선소와의 합작사 설립을 위해 바리바리 돌아다니고 있었고, 마침내 2009년 DSME와의 합작사를 설립했다.
결과적으로, Kennedy씨의 기술은 지금까지 400척 이상의 선박에 적용되었고 수많은 대형 건축물에 적용되었으니, 선급과 해운사의 주요 관계자분들 말이 틀렸음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신조선 사업의 성공은 끝내 이루지 못하셨다.
Kennedy씨와의 첫 만남 때 당신은 20년을 보고 사업을 시작했다는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힘들어도 20년 정도는 헤비급과의 경기를 각오한다는 말이다. 더 놀라운 건, 이 회사의 투자자들을 만났더니 자신들은 손자 세대를 보고 Kennedy씨를 지원한단다. 먼 미래까지도 생각하는 외국 스타트업 지원 문화가 솔직히 참 부럽다.

스타트업을 운영한다고 하면, 주변의 많은 분이 네이버, 배달의 민족, 애플, 구글이나 테슬라와 같은 스타트업의 성공 사례를 말씀하신다. 하지만, 요즘 학자들이 말하는 성장 및 혁신 측면의 정의를 따르면, 어촌 마을에 조선소 짓고, 도면 없이 시작해서 세상에 없던 배를 지어낸 그 시절 조선산업의 선구자들이야말로, 지금 혁신적이라고 추앙받는 그 어떤 해외 기업들보다 야심에 찼었고 드라마틱한 성공 사례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는 벽에 부딪힐 때마다 이렇게 앞서서 길을 만들어주신 분들을 생각하며 힘도 얻고 반성도 하면서, 스타트업 죽음의 계곡을 동료들과 함께 조금씩 기어나가고 있다.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수시로 불어서 함께한 동료들이 내쳐지는 비참한 시국이지만, 조선소 관계자분들도 힘을 내서, 선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보다는 조금 더 먼 미래를 함께 준비해 나아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사의 기술이 아니더라도 조선 관련 수많은 스타트업의 신기술을 학계, 연구소 및 현업 부서 모두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주시고 관심 가져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