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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20
[산업현장이야기] 2년차 전임 설계원의 이야기

<글 :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중형선박설계사업단  정기석 전임 설계원 ksjung@kriso.re.kr>

[들어가며]

필자는 참고문헌이 없이는 글을 못쓰기에 본 코너의 모든 글을 읽어 보며, 문득 쟁쟁한 박사님과 대표님 그리고 조선소에 근무하시는 선배님들과 진정 나란히 글을 올려도 되는가 고심하다 교수님의 부탁에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해버린 과거의 나를 탓하며, 교훈과 감동, 재미는 찾기 힘들겠으나 2년차 전임 설계원이 경험한 산업 현장과 고민을 겉치레 없이 공유하니 공감만은 찾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부산]

필자는 현재 부산 중구에 위치한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KRISO) 산하 중형선박설계사업단의 기본설계팀 전임 설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대학원 시절 학술대회 참가를 위해 처음 부산에 왔을 때 그 강렬했던 인상 탓인지 함께 간 동기에게 “부산 살고 싶다. 나중에 부산에서 살자” 무심코 내뱉은 말이 현실이 되어 돌아왔으니(현재 동기도 부산에 살고 있다.) 얼마나 기대에 벅찼을까. 그렇게 처음 살아보는 도시에서의 삶에 기대를 품고 2018년 한 겨울 부산으로 넘어왔다.

태종대에서 바라보는 망망대해, 황령산의 한여름 야경, 북적이는 남포동 거리, 광안리 해수욕장 등 부산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관광명소를 찾아다니며 부산을 만끽하기를 1년 여, 아쉽게도 더 이상 부산을 느끼기 힘든 나날이 되었지만 다시 한번 그날이 돌아오길 희망한다.

[Ship Design Spiral]

‘부양성, 적재성, 이동성’ 이는 선박의 3요소로 불린다. ‘규정에서 요구하는 복원성을 만족하는가’, ‘선주가 요구하는 화물의 양을 실을 수 있는가’, ‘선박의 적정 속도로 화물을 이송할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3요소는 모두 Stability, Loading Condition, Speed와 같은 기본설계 업무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기본설계는 선박설계의 첫 단추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이는 기본설계 부서를 “선박이 선박 되도록 하는 부서다.” 라고 정의하였는데 과언은 아닌 듯하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사업단은 중형조선소 및 설계기업과 컨소시엄을 맺어 설계지원을 수행하고 있으며, 필자의 첫 프로젝트는 5,000 CBM LPG Carrier 기본설계로 주요업무로는 Basic Scheme, General Arrangement, Trim & Stability 및 Damage Stability 계산 등 업무를 맞아 수행하였다. 하지만 기본의 ‘ㄱ’자도 모르는 신입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처음 다뤄보는 기본계산 프로그램을 교육받으며 무슨 의미인지 무슨 의도인지도 모른 채 주어지는 업무를 수행하기를 몇 주, 절반 정도 업무가 진행된 시점에서 선주 측의 변경사항으로 5,000 CBM의 화물용량이 3,500 CBM으로 변경되어 설계는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Compartment의 1 Frame만 변경되어도 다시 계산해야 하는데 주요제원 전체가 변경되었으니 새로운 선박이나 다름없었고 그렇게 다시 시작된 3,500 CBM LPG Carrier 기본설계, 설계가 진행될 때마다 규정을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원인을 분석하고 여러 해결방안을 마련하여 하나하나 적용하여 결과를 비교하고 가장 적합한 설계안을 선택하여 다시 설계를 이어 나가는 과정을 하루에도 수 차례 반복한다. ‘아, 이게 그 교과서에서 보던 Design Spiral 이구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림이 불현듯 떠오르며 마치 필자가 그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듯했다. 이뿐이면 다행이겠으나 이 과정에서 신입의 잦은 실수로 인한 설계 오작이 발생하고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생겨나 확신이 설때까지 검증을 거치면 결국 설계공정이 늘어난다. 기본설계는 선행으로 선행이 지연되면 후행이 지연되고 후행이 지연되면 전체 프로젝트가 지연된다. 이런 압박감에 실수는 늘어나고 악순환은 반복된다. 물론 경험 많고 유능한 선임, 책임 설계원분들께서 함께 근무하기 때문에 이런 신입의 실수와 설계 변경 정도야 모두 예상하고 프로젝트 일정을 계획하셨겠지만(여담이지만 정말로 10~15년 경력이 있으신 분들은 안보고도 신입의 실수를 알아내신다.) 이러한 중압감 속에 멘탈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 잠시 바람을 쐬면 생각이 정리되고 다시 중압감 속으로 뛰어들 여력이 생긴다. 탁 트인 전경은 아니지만 빌딩 사이사이 도심 속 여유를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중형선박설계사업단이 위치한 부산우체국 옥상 전경>


2년 정도가 지난 지금은 6~7개 정도의 프로젝트를 수행하였으니 수많은 실수로 다져진 실력이 이제는 기본의 ‘ㄱ’자는 알 것 같은 수준이 되어 실수는 잦아들고 문제가 생겼을 때 스스로 고민하여 해결방안을 찾아보기도 하며 나름의 노하우도 생겨 업무 시간도 단축되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날의 실수들이 떠오르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닌 듯하다. 이렇게 설계 업무에 적응이 될 즘 잠시 손을 놓고 있었던 연구활동을 시작하였다. 박사과정 때 쓰던 논문을 완성하고 부족하지만 학술대회 발표 준비도 하며 미뤄왔던 연구활동을 다시 시작하니 문득 필자의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설계원과 연구원 사이]

필자는 아직 박사과정을 졸업하지 못한 수료상태이다. 졸업을 미루고 취업을 선택한 현실적인 이유야 여럿 있지만 그런 현실적인 이유를 제외하면 스스로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부족함을 아는데 내가 박사라니 스스로 납득이 필요했고, 새로운 환경에 필자를 던져 놓고 그럴 만한 실력이 있는지 스스로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다. 혹자는 박사학위를 면허증에 비유하며 일단 면허증을 따 놓고 실력은 그 후에 더 성장시키면 된다고 조언해주었는데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하면 무늬만 박사, 실력 없는 박사가 될 것 같아 두려웠고, 곧 밑천이 드러날까 걱정해야 하는 박사는 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졸업을 미룬다고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것도 아니기에 지금에 와서는 앞서 말한 일단 따 놓는 면허증이 아쉽기는 하나 새로운 경험을 쌓고 스스로 납득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분명 후회 없는 결정이었다. 필자는 현재 설계원과 연구원 사이 어디쯤 있는 듯하다.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선택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설계도 할 수 있는 연구원’이 될지 ‘연구도 할 수 있는 설계원’이 될지는 앞으로 진로를 결정함에 있어 고민해야 할 부분 인 것 같다.

[마치며]

필자는 이제 막 사회로 나온 신입사원이다. 아직도 배워야 할 일은 태산이고, 아직 어느 하나 혼자서는 결정하지 못하는 초보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직도 새로운 일을 배울 때 마다 가슴은 설레고 열정은 살아나는 듯하다. 필자가 속한 사업단은 내년이 사업기간 마지막이고, 필자도 계약이 해지된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음은 어디일까 다가올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필자를 더욱 성장하게 하는 것 같다. 이러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언젠간 필자의 글도 조금은 당당하게 다른 분들과 나란히 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