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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20
[산업 현장 이야기] 어느 해외 박사 후 과정 연구원 이야기

<글 :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박용성 박사, yop001@ucsd.edu> 

들어가며

필자는 2019년 10월부터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산하 연구소인 Scripps Institution of Oceanography(SIO)의 Marine Physical Laboratory(MPL) 소속 박사 후 과정 연구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선배님들과 비교해 필자의 경력이 미천하고 글솜씨 또한 엉망이어서,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유익한 정보를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필자가 직접 체험하며 깨달은 점들을 공유하여, 이곳 현장을 조금이나마 간접적으로 체험하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California, such a lovely place

필자는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 1년 5개월, 미국 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갓 10개월 된 초보 연구자다. 근무지인 연구소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정확히는 La Jolla(라호야) 도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부 캘리포니아의 환상적인 날씨와 더불어 바닷가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연구소는 연구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연구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해외는 여행이 좋다.)
 

 
성격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환경을 진심으로 즐기지는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필자는 1년마다 계약 연장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는 고학력 계약직 외국인 연구 용병이며, 성과를 내지 못하여 계약 연장에 실패할 경우, 불법체류자의 옵션도 붙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환경은, 나태와 안일에 젖은 생활에 빠지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채찍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연구 일상

모든 연구실에 적용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의 연구실은 의무 근로시간 없이 출퇴근을 자율적으로 근무하고 있다. 업무는 주로 연구, 학술대회 준비 및 참가, 실험 및 결과 도출, 논문 작성 및 제출, 저널 논문 심사, 이따금씩 세미나 발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구자들은 주로 각각 개인 연구 주제를 갖고 있어서, 연구 책임자(혹은 지도교수)와 면담 형식으로 연구 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가끔 연구실원들이 모두 모여 세미나 형식으로 각자의 연구 주제를 공유하고 서로 지식, 경험 및 조언 등을 교류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이런 연구 생활은 한국에서의 대학원 생활과 비교해 볼 때,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필자가 속한 연구실은 지구 물리학(geophysics), 특히 지진학(seismology)과 해양학, 수중음향학, 레이더(radar) 공학 분야 등의 적용 분야에서, 수집한 신호를 처리하여 신호 속 정보를 획득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획득하고자 하는 정보로는, 표적 신호의 탐지 여부 혹은 추정 문제에서의 표적 신호의 위치, 속도 등을 포함하며, 수집된 신호를 통해 해양 환경(수층 깊이, 수층 음속 구조, 수중 음향 채널 등) 혹은 지질학적 특성(퇴적층의 구조, 각 퇴적층의 음속 및 밀도 등)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기도 하고, 극지방과 같은 특정 환경에서 수집된 신호 자체에 대한 분석을 하기도 한다.

필자의 연구 분야는 수중음향학과 수중 음향 신호처리로, 수중(바다, 수조실험, 캐비테이션 터널 실험 등)에서 획득한 수중 음향 신호를 통해 특정 표적 신호의 위치나 속도, 신호가 이동한 해양 환경에 대한 정보 등을 추정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에 대한 지원은 현재 미국 해군의 과학 기술 연구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미국 해군연구청(Office of Naval Research)으로부터 받고 있다.

연구 착즙기

필자의 연구책임자는 물론 연구를 본업으로 삼고 있지만, 연구만큼이나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를 고강도로 즐긴다. 몇 달 전, 필자 역시 (압박?에 못 이겨) 자전거를 구입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 자전거를 타고 있다. 근력이 붙으면서 조금씩 따라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그의 속도를 따라가기엔 지나치게 많이 역부족이다. (필자의 아버지뻘 연세임에도 말이다.) 이번 생에는 힘들 것 같다. 자전거를 타면서 필자는, 필자의 연구책임자의 승부 근성을 처절하게 느끼고 있다. 필자는 허벅지가 터져라 그의 속도를 맞춰가고 있는데, 행여 누군가 우리 그룹을 앞질러 나가면, 그는 미친 듯이 속도를 높여 그를 따라가거나 다시 앞지른다. (필자는 그저 동네 불구경하듯 바라보며, ‘아무나 이겨라’의 입장을 취한다.) 달리기의 경우, 필자의 연구책임자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관악산 등산(그는 “언덕 위로 뛰러 갔다 오자”고 말하였다.)을 가이드해주러 갔다가 가이드 당한 적이 있어, 필자는 그와의 달리기를 즐기지 않는다. 연구소 곳곳에 붙어있는 마라톤 인증 사진이나 장애물 달리기로 보이는 대회에서 얼굴에 진흙을 잔뜩 묻히고 달리고 있는 사진으로 보았을 때, 그의 달리기 실력은 눈앞에 훤히 그려진다.

그의 연구 활동은 이런 달리기와 자전거에서의 승부욕을 그대로 연구에 적용하면 딱 들어맞는다. 그의 책상에 항시 준비되어있는 B4 용지에 수식을 일일이 유도해보고 오탈자나 오류를 독수리처럼 낚아채 낸다. 새로운 연구 주제에도 주저 없이 과감히 도전하고, 본인 개인연구도 지속하고 있다. 최근 새롭게 시도한 학술대회 논문은 불합격 처리를 받았는데, 불합격 소식을 연구실원들한테 직접 전하면서 개인 연구 과정을 보여주며 실원들의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연구를 즐기고, 결과물을 제출하는 그 순간까지 짜고 짜내어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다. 덕분에 필자 역시 잘 짜이고 있으며, 이런 끈기와 승부욕을 배워가고 있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덴마크산 유제품만큼이나, 덴마크산 연구 착즙기의 성능은 굉장했다. (필자의 연구책임자 국적은 덴…)

전설의 레전드

자세한 내부 규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곳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연구자의 은퇴는 나이가 아닌 연구에 대한 의지가 결정하는 듯하다. “자네들과 나는 같은 세대 속에 살고 있고, 나는 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정년퇴직 후 유학을 나설 거네.”라고 말씀하셨던 정년을 마주하시는 명예 교수님 말씀이 떠올랐다.

필자의 연구 분야에서 전설이라 불리는 할아버지 몇 분이 옆방에서 연구를 하고 계신다. 전설 한 분은 흉내 낼 수 없는 특이한 웃음소리를 가지고 계시고 8할을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계시며, 세상에서 가장 여유롭고 행복해 보이는 미국인 할아버지로 보인다. 하지만, 연구소 전체 공개 세미나의 질의응답 시간에서, 몸 전체의 공명한 듯한 울림 있는 소리로 단어마다 귀를 때려 박는 날카로운 코멘트에, 필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전설 한 분은 소문으로 바다 환경만 알려드리면 물속 음파가 어떻게 전달되는지 컴퓨터 계산 없이 눈으로 그려내신다고 하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한 박사 후 과정 연구원의 세미나에서, 발표에서 부족했던 내용과 관련된 전문적인 평가 및 조언으로 발표자를 때려눕히시고는, 끝나고 나서 직접 발표자의 개인 오피스를 찾아 친절하고 세심하게 연구와 연구 외적인 것들까지도 조언해주시는 모습은, 필자가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꼬마 연구자인 필자는 오늘도 열심히 연구하여 이분들과 함께 공동 연구를 해볼 수 있는 날을 꿈꿔 본다.

근면 성실, routine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겠지만, 한국인의 가장 큰 강점은 근면 성실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면 성실이 한국인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단어같이 느껴진다.) 강요하고 싶진 않지만, 때마다 자기개발서나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동기를 부여하듯, 근면 성실을 때마다 곱씹는 일은 한 번 더 반복해도 옳은 일인 듯 느껴진다. 필자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자주 들을 수 있는 단어는 ‘deligent’였다. 필자가 사는 집의 집주인 부부 또한 한국인의 근면 성실한 이미지를 이유로 상당히 호의적으로 필자를 받아주었다. 필자는 대학원 수학 기간 지도교수님께 분에 넘치도록 좋은 가르침을 받아 겨우 약소한 연구 능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이곳 연구자들에 비해 연구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심지어 기본적인 의사소통에도 언어의 장벽이 있다. 이런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필자가 가진 강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부모님께 감사하게 전해 받은 ‘건강한 신체’와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떠올렸다.

피드백은 다다익선이라고, 연구 회의를 마치고 코멘트를 받으면, 최대한 정확도를 잃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빠르게 피드백을 하려고 노력했다. 코멘트를 준 사람이 그 내용을 잊어버리기 전에, 코멘트에 대한 답변을 보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면, 행여 필자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답변을 하더라도, 다시 교정하는데 불필요한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빠른 피드백을 위해서는, 짧은 기간 내 끈질기게 그 주제에만 몰두하고 답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므로,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강한 체력이 필요하다. 보통 이런 피드백의 향연(?)은 게릴라성 혹은 시즌제로 벌어지므로, 여유가 생겼을 때는 잠시 잡념을 잊고 즐길 수 있는 운동으로 체력을 비축해두려고 노력한다. 한 편, 지나친 자유를 즐기며 긴장감을 과도하게 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지나친 자유를 즐겼던 필자가 다시 밀려오는 업무들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때 너무나도 힘들었기에, 필자 본인에게 다시 한번 다짐해보기 위함이다.) 이렇게 치열(?)하게 넘어지고 일어나고 하다 보니, 아직 걸음마 단계이지만, 차곡차곡 소소한 성과들을 쌓아가고 있다. 어쩌면 피드백 파티는, 연구 착즙기의 일정, 타이밍, 혹은 성향과 뜻밖에 잘 맞아떨어진 우연일지도 모르니, 언제나 옳은 무적의 방식이라고 여기는 방심은 금물이다.

마치며

필자는 오늘도 잘 짜였다. 필자가 제안했던 연구 아이디어는 회의에서 나온 수많은 코멘트로 누더기가 되었다. 운동이라도 가서 쇳덩이라도 들었다가 당겼다가 돌아오면 조금은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일 텐데,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일상적인 활동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집구석 인터넷으로 접하는 국내외 소식들에서는 좋은 소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훌륭하지 않아도 되고, 꼭 훌륭해지지 않아도 될 테지만, 무엇 하나 위로받을 수 없는 상황들의 연속에서, 마음가짐만이라도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면서 힘든 시기를 잘 버티고 견뎌내다 보면, 최고의 삶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후회는 남지 않는 하루들로 삶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