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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1
[산업현장 이야기] 수주 전 이야기

<글 : 서울대학교 김진기 교수 drpotato@snu.ac.kr>

영업과 영업설계에 대해 소개해 보자는 제안을 들었을 때, 스스로의 경험 외에도 선배들의 경험과 고객에게 전해들은 사례 등 머리를 스쳐가는 많은 소재들이 있었다. 현대중공업의 500원 지폐처럼 전설로 알려진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숨겨진 이야기들이다. 학교에서 배우기도 어렵고 현장에서도 소수만 접하는 분야인 것은, 회사의 영업비밀이나 고객과의 관계 등 민감한 부분을 포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에세이보다는 이야기 한 편을 들려 드리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아래 상황과 인물들은 상선 영업 과정에서 있을 법한 경우를 가정한 허구의 시나리오이며, 특정 인물이나 회사 또는 사건이 연상된다면 순전히 우연이다.

기회는 갑자기 찾아온다

가을이 시작되는 수요일 늦은 오후, 신라중공업의 해외지점 주재원인 철수는 경쟁사에 주로 발주해 왔던 AB해운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AB해운의 발주담당임원 Chris가, 내일 오후에 미팅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비즈니스 예절을 지켜 정중하게 물었지만, 발주처와 공급처의 관계인 만큼 열 일 제쳐두고 시간을 내야만 할 일이었다. 마침 내일 오후에 입국하기로 한 출장팀의 일정이 이틀 연기되어 오후 일정이 빈 참이었고, 호텔 예약이 변경되었는지만 확인하면 되었다.

영국인인 Chris는 외부와의 미팅 시간을 밀크티 타임으로 잡는 일이 종종 있었다. 목요일 오후 3시 미팅 자리에는 지난 주에 새로 부임한 기술임원 Donald도 나와 있었다. 지구온난화와 수퍼태풍에 대한 관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밀크티와 함께 나오는 부담스러운 크기의 쿠키 하나를 해결한 다음에야, 철수는 최근에 개정된 표준선 Pocket Plan을 건넬 수 있었다. 시간을 들여 페이지를 넘기던 Donald는 신라중공업의 선형 대신 AB해운이 새로 개발한 선형으로 선박을 건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AB해운은 운항비용 절감을 위해 유럽의 상업수조 EFMB와 선형개발을 수행하였고, 수선길이를 2m 늘이고 선폭을 1m 줄이는 새로운 선형을 도입하기로 하였다. 필요한 시점에 반드시 인도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하였으나, AB해운은 시장가보다 2백만 달러 더 높은 선가를 제안하였다. 노련한 철수는 Donald의 노력을 칭찬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본사 검토 후 일주일 안에 답변을 주겠다고 하고 미팅을 마쳤다. 마음은 급했지만, Chris의 비서에게 작은 초콜릿 상자를 생일선물로 건넨 후에야 AB해운을 나올 수 있었다.

서울의 금요일 새벽, 침대에서 철수의 보고를 접한 신라중공업 영업임원 기영은 즉시 기본설계부에 이메일을 보내어 새로운 기회를 알렸다. 경쟁사에 우호적인 고객의 바잉오퍼라니, 우선순위가 매우 높은 건이었다. 점심 식사 전 11시, 영업부와 기본설계부 6명으로 구성된 프로젝트팀 회의가 열렸고, 기능별 검토에 들어갔다. 문제점을 바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2명이나 있었지만, 대책이 없는 문제 제기를 절대불허하는 기업문화 때문에, 철수에게 경고할 기회는 조용히 사라졌다.

주말을 사무실에서 보낸 프로젝트팀은 월요일 오후 1시, 점검 회의를 가졌다. AB해운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안에 대해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먼저 목표로 하는 도크 배치에는 더 길어진 선형이 들어갈 수 없었다. 길이에 여유가 있는 배치는 3개월 후, 따라서 고객이 희망하는 납기보다 2개월 후가 된다. 9월을 납기로 하고 있는 선표라서 최근 늘어나는 강수량과 태풍을 고려하면 하절기의 건조공기 2개월 단축은 현실적이지 못했다. 그런데 주요 요목이 바뀌어서 편집설계를 할 수 없으니, 설계공기도 줄일 수 없는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보다 선표 확보가 우선문제가 되었다. 한편 연구소에서는 철수가 비밀유지서약서에 서명하고 받아온 자료를 그간의 개발 실적과 비교하였다. 과거에 매우 유사한 선형을 개발해 놓은 실적이 있었고, EFMB의 모형시험 결과처럼 현재 표준선 대비하여 연료소모량은 개선됨이 분명했으나, 원가가 올라가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채택되지 못했던 건이었다. 그렇다고 고객의 의견을 바로 거절할 수는 없었다. 과거와는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지만 시간이 더 필요했다.

월요일 아침에 본사의 지침을 받은 철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 좋게 고객의 요구를 수용해 주리라는 기대와 달리, 신라중공업 선형시험수조에서 모형시험을 해 보고 3주 후에 답을 주겠으나, 가급적 신라의 표준선을 수용해 주었으면 어떻겠냐고 AB해운과 조심스럽게 논의해 보라는 것이었다. 철수는 이 지침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을 만큼은 경험이 있었다. 늦으면 긍정적이기라도 해야 하는데, 목요일까지 예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3주 후에도 반응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이른바 행간이 읽어졌다. 좋지 않은 이야기는 만나서 해야 되는데, Chris가 출장을 가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Chris에게 전화로 양해를 구했다. 신선형에 대한 추진동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고 했더니, AB해운의 의지는 매우 높으며 내일 오전에 Donald를 만나서 사정을 얘기해 주라고 했다. 신라중공업 본사에서 기술적인 문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고객의 기술이사와 할 수 있는 논의가 없는, 흔히 말하는 실탄이 없는 미팅이 될 것이었다.

화요일 오전에 AB해운을 방문한 철수는 조심스럽게 운을 떼어, 본사 검토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철수가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자, 사실 상 거절이라고 판단한 Donald는 갑자기 Chris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더니, 한국의 조선소가 하나같이 비협조적이고 혁신의지도 없다며 소리를 질러대었다. 불같은 성격 때문에 오일 메이져 회사에서 퇴출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본사의 검토기간을 줄이도록 하겠다고 Donald를 진정시킨 철수는 바로 AB해운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경쟁사에서도 원하는 답을 주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Donald가 Chris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은 한국 조선소에 우호적인 Chris의 개입을 막으려는 것 같았다. 앞길이 순탄치 않아 보였다. 철수가 Donald의 반응에 대해 본사에 보고서를 쓰는 동안, 신라중공업에서는 두 가지 트랙으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기회는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본설계부에서는 상세설계부, 구매부, 건조부와 상세협의에 들어갔다. 기술적 문제는 큰 것부터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설계를 새로 해야 되는 경우이다 보니, 고민해 보지도 않고 안된다로 시작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설계공기를 충분히 준다는 전제로 해결되는 것이 당연했다. 이렇게 설계나선(design spiral)을 제대로 타야 하는 호선은 경험이 많은 담당자를 배정해야 해서, 상세설계부의 인력 운영에 상당한 부담을 줄 것이었다. 더구나 기존에 한 번 기각되었던 사안을 다시 검토해서 방법을 찾아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만스러울 일이었다.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며칠 간의 협의 끝에 몇 가지가 남았다.

늘어난 길이와 줄어든 폭에 따라 종강도를 다시 평가했다. 길어진 길이는 가시성 문제를 만들어 선교(bridge)의 높이를 높여야 하는데, 줄어든 폭 안에 국제노동기구 규정을 만족하는 선실을 배치하기 위해서는 한 층 증설이 불가피했다. 표준선 선형은 선속을 확보하면서 선각 중량이 최적화된 조선소의 가장 큰 자산인데, 선각 중량에 영향을 주는 변경은 민감한 사안이었다. 다행인 것은 AB해운에서 엔진 가격 감소와 강재 증가 비용을 제시선가에 반영해 놓았다는 것이고, 불행한 일은 강재가격이 계속 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폭이 좁아진 선형의 선수 부분은 닻을 내리는 각도가 국제 규정을 만족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페인트 발색까지 신경을 쓰는 AB해운이 비정상적으로 큰 벨마우스를 고려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는지 의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 크기의 선박에서는 예술이라고 부르는 엔진룸 배치에 있었다. 엔진룸 좌우에 코퍼댐이 필수가 된 후, 폭 방향의 배치에 자유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표준선은 발전기 2대를 설치하여 1대 운전 및 1대 대기의 원칙으로 최적화되었다. 그런데 AB해운의 사양은 2대 운영 및 1대 대기로 운영하고 진동소음 수준은 매우 낮게 요구한다. 폭은 줄었는데 발전기를 1대 더 설치하는 배치는 유지보수를 위한 공간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있고, 새로운 선형에서는 구조부재 배치가 달라져 표준선에서 최적화했던 수준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구매부에서 압박했음에도 불구하고, 3대 납기가 가능한 발전기 엔진은 GH엔진 뿐인데, 가격도 높거니와 고질적인 진동 문제가 발생하는 모델이었다.

한편 영업부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기회를 찾아 조선소의 감독관 사무실을 일일이 방문했다. 정례적인 일정은 아니었지만 지난 달의 때아닌 수퍼태풍 이후로 기회가 될 때마다 프로젝트관리부와 함께 만남을 만들어가던 터였다. 수퍼태풍 때 건조중인 선박에 손상을 입었던 선주들은 후속발주 계획을 들먹이며 수리를 독촉하였다. 발주 이야기는 단지 수리를 빨리 완료하기 위한 구실인 것 같아 보였지만, 기꺼이 정보를 알려준 데에 대해 감사를 표해야 했고, 조심스럽게 확인을 해야 할 사안이었다.

목요일 오전, 끝에서 세번째 면담자인 IJ해운에서 때마침 잘 왔다며 어려운 부탁이 있다고 했다. 화물 사정 때문에 건조 중인 시리즈선의 4호선 납기를 늦추어 줄 수 있겠느냐는 요청을 들었을 때, 기영은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현재 AB해운에 제시한 선표를 IJ해운에 주고, 그 빈 자리를 AB해운에게 배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늘 같은 화주께서 주신 도움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킨 기영은, IJ해운에게 추가금을 제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목요일 오후, 프로젝트팀이 다시 모였다. Donald의 반응이 알려졌고, 시간을 끄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다. 영업설계임원 동수가 미팅을 주도했다. 조선소의 의견이 정답이 아닐 수 있으며, 때로는 고객에게 결정을 맡기는 것이 좋은 대안이 되기도 한다. 고객의 의견을 경청한다는 좋은 인상을 주고, 투자비용과 운용비용 양측을 모두 고려한 의사결정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며,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나누게 된다.


기술미팅 형식으로 고객을 만나보기로 했다. 큰 문제들을 한꺼번에 모두 해결하려고 하면 안된다. 협상이 성공하려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았다고 느끼게 해야 되는데, 줄 것이 많지 않은데도 얻으려는 것을 늘어놓으면 승산이 없다. 닻 문제를 던져 놓고 발전기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때마침 현지에 계약을 완료하고 귀국할 예정인 기술팀이 있으니, 그 팀 중 필요한 분야 담당자들을 잔류시키는 방법이 있었다. 최대한 자료를 준비하여 고객이 결정을 내리기 쉽도록 지원해 주어야 한다. 상세설계부에서 인력을 지원받아 선수부와 엔진룸의 도면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제안된 새 선형에 따라, 1안은 과거 AB해운 실적선의 배치에 근접한 도면이고, 2안은 신라중공업의 표준 도면이다. 두 가지 설계의 비용 차이를 이틀에 승인 받는 것은 도전이 될 것이었으나,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목요일 아침, 기영의 전화를 받은 철수는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으면 화요일 오전에 그 소동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현지 출장팀 2명이 잔류하는데 도움을 주고 다음 주에 최대한 일찍 기술 미팅을 주선해야 한다. 불만을 갈무리한 철수는 AB해운에 전화를 했다. 월요일 아침은 방문 시간으로 적합지 않을 터였다. 어김 없이 회의 중인 Chris와 Donald에게 이메일을 보내, 월요일 오후에 기술자들이 방문하고자 하니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간단한 미팅을 하자는 일정을 제안했다. 지난 버전의 그룹웨어는 이메일 서버 지연이 20분이 넘었었다. 어제 업데이트가 된 덕택에 호텔에서 10분 전에 보낸 이메일에 답장을 하고 여유있게 사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기술팀 잔류자 2명이 신청한 숙박연장을 확인해 줌으로써, 이 호텔과 계약된 연간 250박이 달성되어, 내년 단가 협상이 편해질 것이다.

출장팀 귀국 전에 같이 점심을 하기로 한 식당에서, 철수는 비로소 이번 건에 기술적인 문제들이 많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출장팀이 알려준 기술적 문제점들은 당연히 철수에게 알려졌어야 할 것들이었지만, 철수는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2년 전 KL라인과 기술미팅 중 전장설계 담당자의 영어 문제로 고객과 논의가 안 되는 것을 보다 못한 철수가, 기술자 대신 협의를 하겠다고 나선 끝에, 폐기된 법규를 수용한 잘못을 계속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설계변경에 따른 재무적 손실을 초래한 책임을 묻고 있지만, KL라인은 발주기회가 있으면 철수부터 찾는 이른바 우량고객이 되었다. 철수 생각으로는, 이번 건도 AB해운의 사주와 KL라인의 사주가 사촌 간인 것이 유효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오후 5시가 넘어, 고맙게도 Chris가 전화를 주었다. 친절한 Chris는 Donald의 입장에 대해 지루한 설명을 시작했지만, 좋은 소식으로 통화를 마쳤다. 화요일 오전까지는 시간이 없을 것으로 생각해서 연락을 미루었으나, 월요일에 예정된 미팅 중 하나가 연기되어 시간이 생겼으니, 월요일 오후 늦게 미팅을 하고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저녁 식사 제안은 매우 우호적인 신호로 보였다. 감사를 표하고 미팅 확정을 본사와 잔류 출장팀에 알렸다. 일요일 오후를 기술자들과 함께 사무실에서 보내고, 혹시 문제가 발견되면 월요일 오전에 본사와 논의한 후 오후에 미팅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때문에, 대사관 무관과의 일요일 골프 약속은 취소해야만 했다.

기회는 항상 위기와 함께 온다

일요일 오후는 평온하게 지나갔다. 잔류 기술자들은 본사의 자료를 충분히 이해했고, 도면들도 깔끔하게 출력되었다. 과거에는 대형출력이 필요하면, 그 크기가 가능한 인쇄소를 찾아 헤매든지, 고객사에 전자파일을 보내 출력을 부탁하든지 했을 것이다. 심하다 싶게 표준화를 진행한 끝에 대부분의 도면은 A3 또는 타블로이드 용지에 출력할 수 있고, 어차피 PDF 파일인 것을 아는 마당에 삼각스케일을 가지고 와서 축척이 맞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고객들도 없어졌다. 관리력 향상과 기술 발달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일상을 더 편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미팅 직전에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기술자들이 체류하는 호텔 로비에서 대기하던 월요일 오후 1시, Chris의 비서가 전화해서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AB해운의 운항선에 문제가 발생하여 긴급상황이 되었으니, 미안하지만 미팅을 최소 일주일 후로 연기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은 늦은 밤이었지만, 현지의 상황을 즉시 보고함과 동시에 본사의 판단을 요청해야 했다. 기영의 의견은 철수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기술문서를 전달하되 미팅은 충분히 뒤로 미루라는 지시를 했다. 기술적으로는 Donald의 직원들이 도면을 검토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며, 영업적으로는 새로 생긴 문제의 여파로 상황이 바뀔 것이 분명한데 일을 급하게 진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Chris의 비서에게 전화해서, 예정했던 오후 4시에 실무급 직원들을 20분만 만나면 좋겠다고 했고, 15분 후에 방문이 승인되었다. 미팅 연기를 들은 기술자들은 밤늦게 출발하는 항공편을 예약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실 주말이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가자 철수의 마음은 오히려 불안했었다. 평소에 기영은 근거 없는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강조하고는 했는데, 언젠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쩐지 불안하더라니’라고 할 게 아니라, 평소에는 일어났으나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무엇인지 되새겨 보라고 했었다. 이번에 일어났었어야 정상이었던 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안개가 가득한 숲 속에서 나무 줄기들을 하나씩 더듬는 기분이었다.

신라중공업의 3명이 AB해운에 도착하자, 새로 만들었다는 대형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이름있는 건축가로 알려진 사주의 딸이 직접 설계했다고 하는 새 회의실은, 흔히 보이는 LCD 프로젝터나 평면 TV도 없는 대신, 모든 창문이 투명 디스플레이로 되어 있었다. 평소에는 남쪽 창밖 경치를 보거나, 북쪽 복도에서 회의실 내부를 볼 수 있지만, 버튼을 누르면 선택하는 유리들이 불투명한 모니터로 변하는 시설이었다. 의장석에서 볼 때, 양쪽으로 늘어선 유리마다 실척의 참석자가 비춰지는 화상회의를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이 회의실로 예약했던 것을 보니, 이번 건이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Donald와 함께 낯이 익은 기술직원 2명이 나와서, 신라중공업이 작성한 도면들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나서, Donald가 조용히 철수를 불렀다. 운항선에 문제가 발생한 것 외에 사내에 다른 문제도 있으니, 본래 신라중공업이 제안했던 3주 후에 각자의 대책을 가지고 다시 만나자고 했다. 철수는 도면을 중심으로 서면 대화를 계속하자고 합의했고, 어려운 시점에 만나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기술자들을 공항으로 데려다 주는 길에 랩업 미팅을 하니, Donald는 곁에서 잠깐 듣고도 실무기술진보다 신라중공업의 우려를 더 잘 이해한 것 같아 보인다고 했다. 좋은 소식이었다. 서면 보고와는 별도로, 철수는 기술팀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귀국하자마자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논의한 후에, 예정했던 3주 후 그러니까 앞으로 2주 후에 선가와 제시사양을 가지고 계약미팅을 할 수 있게 준비할 것이다.

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한 철수는 안개 속의 나무에 다시 집중했다. 작년 달력을 뒤져 보던 철수는 문득 경쟁사 백제조선의 전임 지점장을 떠올렸다. 대학 선배인 이 분은, 유명 해운 브로커의 집안 행사가 TV에 나오면서 한국 사회에 유명해졌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목례만 하던 사주의 작은 딸이 이 분에게 달려가서 반기는 장면이 잡혔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싫어했던 선배는 후임에게 작은 수첩의 사본을 남겼는데, 해운사 사주들의 집안 행사를 깨알같이 적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 때 KL라인 사주의 집안 행사가 있었다. 사주 동생의 생일이었는데, 한국인 부인이 환갑잔치로 준비해서 한국인 여러 명이 참석했었다. 금년에는 부인의 환갑과 더불어 결혼 30주년이라고 잔치를 더 크게 해야겠다고 일정을 비워 두라고 했었는데, 초대가 없는 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지나가는 말일 수도 있었겠지만 한국 문화로 행해지는 행사는 최대한 지키는 것이 여기 이민사회의 풍습이기 때문이다.

KL라인의 발주담당임원 Martin에게 연락을 해 보았다. 개정된 Pocket Plan을 전달하기 위해 방문하고 싶은데, 언제 시간이 나느냐고 물었다. 내일 오전 10시가 어떠냐는 철수에게, Martin은 좀 망설이더니 11시에 들어오라고 했다. 철수에게는 그 망설이는 잠깐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수요일 오전 11시,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KL라인의 회의실은 소박하기가 그지없다. 필요한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지만, 가격 대 성능비가 낮은 물건은 없다. 기술진들이 방문하면 그 소박함에 놀라면서, 진실만을 말해야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주눅이 든다고 했다. 반갑게 인사를 하긴 했어도, Martin은 평소답지 않게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건네 준 Pocket Plan은 두고 가면 검토하겠다고 하면서, 철수의 태도에 신경을 썼다. 야드 감독관 사무실에서 이야기가 나왔다는 말은 접어 두고, 혹시라도 후속 발주가 있느냐고 묻는 철수에게, Martin은 지금 신라중공업에서 건조 중인 2척의 옵션 행사를 검토하고 있다고 매우 건조한 답을 주었다. 끊임없는 체인옵션을 걸어두는 것이 KL라인의 방식이다. 2척 옵션을 행사하면 또다시 2척 옵션이 생기는 것이다. 시간을 내 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KL라인의 사무실을 나설 때, 파쇄를 기다리고 있는 인쇄물 중에 눈에 익은 동양인의 사진이 포함된 것을 보았지만 누구인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온 철수는 책상 위의 신문을 보고 그 동양인이 누군인지 기억해 내었다. 지금은 KL라인의 선장 중 한 명이지만, 과거 신라중공업에서 AB해운 감독관으로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 선장이 인도양에서 불법화물을 운송하는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KL라인이나 AB해운에 책임을 물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Martin이 아직 점심식사 전이면 푸드트럭에서 케밥이나 먹겠냐는 전화가 왔다. 사무실에 비치된 도넛을 이미 두 개나 먹었지만, 호빗처럼 끼니를 여러 번 먹을 수도 있는 일이다.

미리 주문해 놓은 케밥을 건네고 Martin은 거듭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어리둥절해 하는 철수에게 Martin은 철수가 불법화물에 관련한 정보를 캐려 했다고 오해했다는 사정을 털어놓았다. 최근 며칠동안 신문사들이 기소된 선장 건으로 끊임없이 연락을 해 왔고, 오늘 오전 10시는 평소 KL라인에 악성기사를 쓰는 기자가 조선소와의 관계를 물으려고 방문하겠다는 바로 그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헤어지기 직전 Martin은 그 선장 때문에 KL라인 선박 4척이 조사를 받게 되었고, 화물의 납기지연을 피하기 위해 AB해운에 도움을 청했다는 사정을 알려 주었다. 특히나 사주의 동생이 무척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는 것은, 철수가 아니었다면 들려주지 않았을 이야기일 터였다. 이 나라의 사법 제도에 따르면, 의심 항구에서 선적/하역 실적이 있는 선박에 대한 조사가 1년 가까이 지속되므로, 운항 회수가 줄어들게 된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인도양 불법화물에 연관된 정보를 캔 셈이었다.

KL라인에 선박이 부족한 상황이 지속되는 한, AB해운은 단기용선도 알아보겠지만, 곧 인도될 신조선들의 운항계획과 발주계획을 다시 짜려고 할 것이다. AB해운과 KL라인의 자선과 사선의 운영계획을 모두 다시 검토하는 데에는 2주가 꼬박 필요할 것이다. 이번 발주 척수는 지난 주에 언급된 수준보다 늘어나고, 단납기를 제시할 수 있으면 선가는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Donald의 기술적 자존심을 지켜 주면, 얻을 것이 많다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으로 보였다.

기회를 마무리하는 것은 철저한 준비다

이 나라의 고대 종교를 기리는 3일의 연휴를 고려하더라도 2주는 빠르게 지나갔다. 처음 사흘 동안 논의 항목이 계속 늘어나더니 메모랜덤이 20 페이지를 넘어섰고, 지루한 서면 토의 끝에 14 페이지에 달하는 100여 개 항목은 잠정적으로 합의되었다. 논의에 필요한 도면들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철수가 인쇄해서 배달해야 했지만, 그러면서 더 많은 기술진의 얼굴을 익히는 기회로 삼았다. 조선소는 고객이 원하는 선박을 인도하기 위하여 매번 새로 설계하여 건조한다고 알고 있었던 철수는, 표준선이라는 개념이 원가를 방어하는 편법 중 하나로 치부하고 있었다. 시간을 들여 이번 논의를 따라가면서, 표준선 사양에는 기존에 발견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들어 있다는 것과, 고객 요구로 변경된 사양 중에서 사전에 거르지 못한 결함이 뒤늦게 발견될 때의 혼란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기술적 모순을 최대한 미리 해결해 두는 것이 기본설계와 영업설계의 역할이고, 영업의 역할은 고객의 마음을 잡아두는 것이라는 회사의 역할 정의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양사 간에 서면 논의가 잘 정리된 상태로 시작되었고, 동수가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술 미팅은 순조로왔다. Donald는 자사가 개발한 선형으로 무려 6척을 건조하기로 하면서, 꽤 많은 것을 양보하였다. 계약 후 발생하는 문제 중 선형 변경으로부터 발견된 문제는 함께 논의하여 해결하되, 신라중공업은 설계 최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합의되는 비용을 AB해운이 부담하기로 하였다. 지나치게 커지는 벨마우스는 구조해석을 해 보고 선수 갑판 라인을 얼마나 수정해야 할지 결정할 것이다. 신라중공업이 후속선의 납기를 짧게 제시하였기 때문에 강재가의 상승도 AB해운의 예상보다 억제되었다. 고민스러운 발전기 3대는 주문자 공급으로 변경하고, AB해운이 직접 NO엔진과 협상하기로 하였다. 곧 신라중공업은 믿지 못할 납기와 단가를 보게 될 것이고, 이 조건은 당분간 구매부를 무척이나 괴롭게 할 것이다.

철수는 본연의 업무인 선가 협상에 집중해야 했다. 사실 본사의 재무기법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였다. AB해운이 선가를 과소하게 설정했기 때문에 운항비용 감소가 장기적인 이익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계산되었지만, 실제 상황은 이익이 그렇게까지는 상승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객이 낼 수 있는 선가 수준으로 근접시키기 위해 명목 선가와 이익을 함께 만족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단납기 선표를 제공하면서, 선수금 비율을 높였다. 요즘처럼 운영자금 이자가 높은 시기에는 선수금 비율은 매우 효율적이다. 이번에 새롭게 적용하는 방법은 지불통화의 다변화이다. 이번 선가는 선수금 20%를 유로화로 지불한다. 현재 유럽의 자금은 풍부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단기적인 유로화 감소로 환율이 매우 유리해진 상황이었다.

계약서는 법률 문서이기 때문에, AB해운의 계약 담당은 언제나처럼 전문 변호사이다. 반면, 신라중공업은 지점장이 계약서를 합의한다. 철수는 기술진이 합의한 사항을 계약서 문구로 변경하는 작업에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지만, 새로운 프로젝트의 첫호선 계약서는 언제나 부담이 되었다. 과거 신라중공업이 계약서를 법정에 가지고 간 적이 두 번 있었는데, 그 중 한 번은 기영이 실무담당자였기 때문에, 철수는 기영으로부터 저자직강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 상황을 가정하고 계약서 문구에 의견을 내어, 변호사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나흘 간의 미팅이 끝났다. 내일 오전에는 양사 간에 계약서명을 앞두고 있다. 내일 오전 서명이 끝나면 기영과 동수가 이 나라의 다른 고객들을 두루 만나보고 귀국할 것이다. 사정이 그러한 만큼 KL라인이 식사를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미팅이 확정된 고객사 중에서 식사 일정을 추가로 잡아야 한다. 철수는 방문이 예정된 고객사와 그 고객이 선호하는 식당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가며 다음 주 일정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마치며

영업은 회사의 얼굴이면서 고객을 공략하는 창이다. 기본설계와 영업설계는 회사의 원가를 지키는 방패다. 이들은 고객의 과도한 요구를 최일선에서 겪지만, 어떻게든 고객을 설득하여 계약을 만들어 낸다. 이들이 공을 다투지 않고 조화롭게 협력해야 수주가 이루어진다. 많은 회사가 리스크를 관리하고 있다고 하지만, 단지 리스크를 회피하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 우리 산업에서 가장 큰 리스크는 고객을 경쟁국에 빼앗기는 것이다. 한 번 돌아선 고객은 두 번 돌아서기도 쉽다. 이렇게 무너진 영업망을 복구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들고, 개발해야 하는 기술수준도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높아져서, 결국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모두가 이해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