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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21
[조선인이 쓰는 조선 이야기] 사양산업 논란

<글 : 대우조선해양 이종무 책임 jongmoolee@dsme.co.kr>


'조선인' 하면, 일반 독자들은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을 비하하여 일컫던 '조센진'이란 말이나 중국 동포를 이르는 '조선족'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학회 웹진을 구독하시는 여러분들은 아마도 제일 먼저 ‘저와 같은’ 생각이 떠오르셨을 것입니다. 네, 제 글에서 '조선인'은 조선해양공학을 전공했거나, 조선해양 산업계에 종사하시는 여러분 같은 분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조선 산업은 상대적으로 일반인들의 관심이 적고 정보가 한정적인 산업 분야인 것 같습니다. 제가 업무로 관련 검색을 해보면 정말 원하는 정보를 찾기가 힘듭니다. 간헐적으로 뉴스에 나오는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 식'의, 심지어는 오류가 제법 보이는 정보들만 주로 접하게 됩니다.

답답해하다 못해 저라도 조선 산업 관련 이야기를 기록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널리스트나 기자의 시각이 아닌 ‘진짜 조선인’의 경험과 생각으로 말이죠.  

저는 보통의 전공 학생이나 직장인들과는 조금 다른 커리어 패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니어 시절에는 지도 교수님 및 선후배들과 그 당시 유행하던 기술벤처기업도 설립해 보았고, IT 개발자로 대형 조선소의 PI(Process Innovation) 프로젝트도 참여해 봤습니다. 중국 현지에서 운영되는 한국 조선소에서 근무한 경험은 그야말로 '레어템'이고, 저처럼 공학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으나 연구소나 기술 쪽이 아닌 전략, 영업, 기획 등 경영 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이것 말고도 사실 저에겐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있는데, '실패의 경험'이 바로 그 것입니다. 저는 특이한 커리어 덕에 2000년대 중후반 해운-조선 수퍼사이클 이후 무너져 간 국내외의 여러 중소 조선소들의 몰락 과정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그 중 일부는 영향력과 책임이 있는 자리에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는 매우 아픈 기억이고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다면?'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아쉬움이 크지만, 그 경험은 현재의 저에게 크고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조선 산업계의 구석구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조선해양 산업 전반에 대한 본원적 경쟁력과 위협요소, 본질적 가치와 거시적 전망 등에 대하여 나름 대로의 차별화된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국 조선업계의 어려움은 아직 현재 진행형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조선 산업의 수퍼사이클이 끝난 2010년대 초반, 중소형 조선소는 여러 가지 이유로 대부분 쇠락의 길을 갔지만 국내의 빅 3 대형 조선소는 유가의 고공행진과 더불어 시작된 해양플랜트 호황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오히려 몸집을 거의 2배로 늘려가며 승승장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투기에 가까운 과도한 해양 투자 설비 물량이 쏟아지던 2010년 대 중반, 영원히 고공행진을 할 것 같았던 유가가 세계 경기의 침체 및 미국의 셰일 혁명과 에너지 정책 변경 등의 영향으로 폭락하자, 가뜩이나 급격한 몸집 불리기로 몸살을 겪고 있었던 조선소에 재앙이 되었습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조선 3사는 해양 플랜트 분야에서 천문학적 손실을 보며 추락하였고, 저유가 기조 및 전 세계적인 친환경 에너지 전환으로 완전히 식어버린 해양플랜트 시장과 세계 경기 침체의 장기화 및 COVID-19 등으로 하릴없이 지연되고 있는 조선 시장의 회복을 기다리며 오늘도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과연 한국의 조선 산업은 끝난 걸까요? 혹자가 얘기하듯 ‘좀비 산업’이지만 그래도 많은 고용효과가 있으니 국가가 재정을 투입해서라도 끝까지 끌고 나가는 것이 필요할까요? 적자가 계속된다던데, 만일 가장 많은 선박을 시장에 내놓는 한국이 공급을 조절하면 선가를 올려서 금방 적자를 면할 수 있는 걸까요? 그리고 앞으로 세계적인 환경규제 추세 및 LNG 호황으로 한국 조선산업이 결국 화려하게 부활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경직된 노동정책 및 인건비 증가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후발 국가에게 왕좌를 물려주는 수순을 가게 될까요?  

위 질문에 답이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앞으로 총 4회에 걸쳐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조선 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최근 20년간의 격변하는 세계의 정치경제 상황 속에서 한국의 조선 산업이 어떻게 웃고 울었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모습은 어떠할 지까지, ‘조선인’이 쓰는 진짜 ‘조선 이야기’에 독자 분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이번 편에는 그 첫 번째 주제로 우리 산업에 대한 오랜 논쟁 거리인 ‘사양산업 논란'에 대한 내용을 다뤄 보겠습니다.

(1) 사양산업 논란

'사양(斜陽)'이란 말 그대로 정오의 태양이 서서히 기울어져 지평선이나 수평선 아래로 저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요가 없어져 시장이 대폭 축소 혹은 사라지거나, 시장은 그대로 있으나 국가차원에서 산업 경쟁력을 잃어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조선 산업은 어떤 의미에서 사양산업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걸까요?

먼저 수요 및 시장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선박의 수요나 시장 자체는 당분간 사라질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일부 독자들 중 '비행기나 철도, 트럭 그리고 파이프라인(오일이나 가스 같은 경우) 등이 선박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지 않나?'라고 의문을 가지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운송 수단들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선박 대비 경쟁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우선 항공과 철도 모두 선박 대비 운송단위가 너무 작고, 특히 육로 운송은 주요 루트마다 효율성 있는 운송 인프라(도로, 철도)를 확충해야 하는 막대한 비용 문제가 걸림돌이고, 설사 이를 확보했다 하더라도 바다에 막히면 답이 없습니다.

철도는 한 번에 최대 컨테이너 60개를 운송할 수 있고 비행기는 중량 기준 3개 정도만 수송이 가능한 반면, 컨테이너 선박은 한 번에 최대 2만 4천 개의 컨테이너를 운송할 수 있습니다. 운송 단위의 크기는 경제성의 문제로 직결됩니다. 결국 상대적으로 작은 투자인 항만과 선박을 이용한 해상 운송만큼 효율과 경제성을 가진 다른 방법은 당분간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좌) 컨테이너 화물 열차 (출처: Railfreight.com), (중) 세계최대 화물기 벨루가 (출처: airbus.com), (우) HMM 24,000 TEU 컨테이너선 (출처: HMM)

  

그렇다면 논쟁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수요의 급격한 감소'입니다. 최근 장기적 세계경제 침체와 자국 우선 정책,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 등으로 글로벌 해상 물동량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이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가 지속될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각 국가의 자급자족이 가능한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보입니다. 글로벌 해상 물동량이 드라마틱하게 줄어들기 위해서는 전 세계 주요 생산, 소비국들이 자국 안에서 구한 원자재와 에너지 자원만 가지고 필요한 물품을 스스로 생산하여 잉여 없이 소비하는, 이른바 '자급자족형 경제'가 가능해야 합니다. 세계에서 원자재를 대부분 자국 안에서 구할 수 있고, 물품 가격이 비싸지더라도 무조건 자기 나라에서만 만들며, 딱 필요한 만큼만 만들고 혹 남는 건 그냥 폐기하는 그런 나라가 존재하는지 의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래서 좋든 싫든 이런저런 이유로 서로 협력하고 교류하며 살아가야 하는 얄궂은 운명 공동체 임이 분명합니다.
 


<국제 선박 운항 루트 이미지 (출처:  shipmap.org)>


그렇다면 수요, 시장적인 측면에서 조선 산업은 앞으로도 'Rising Sun' 까지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매력이 있는 산업으로 유지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결국 우리나라 조선업이 사양산업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두 번째 조건인 '시장 경쟁력' 부분을 깊이 있게 들여다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글로벌 조선산업의 주요 경쟁국은 한국, 중국, 일본 정도로 추릴 수 있습니다. (유럽은 크루즈선 및 군함에 특화된 별도 시장이고, 싱가포르는 해양플랜트 일부 분야에서만 소규모로 경쟁하고 있기에 논의에서 빼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각국 조선산업의 향후 경쟁 구도는 어떻게 될까요?

조선 산업의 향후 전망을 논할 때, 과거 영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다시 한국에서 중국으로 주도권이 이양되고 있는 상황으로 이해하시는 독자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이동 원인'으로 주로 거론되는 것은 바로 '인건비'입니다. 가장 설득력 있고 수긍이 가는 설명입니다. 즉, 조선 산업의 주도권이 서구 유럽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 이유도, 일본이 한국과 중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게 된 결정적 원인도 바로 '인건비의 상승'이며, 한국도 결국은 중국으로 조선의 주도권을 넘기게 될 거라는 논리입니다. 노동 집약적인 조선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원가 요소 중 하나인 이 '인건비'에 대한 논리는 현재 절대적 진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과연 정말 그럴까요?

얼마 전 제가 들은 매우 충격적인 소식 중에 하나는 "한국 근로자의 평균 임금이 일본을 추월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소식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7배 이상 차이 나던 중국과 한국의 제조업 평균 임금이 이제는 3배 이내의 수준으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얘기한 '인건비 경쟁력 논리'대로라면, 한국은 이제 곧 일본에게 다시 제왕의 자리를 내주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한 엄청난 인건비적 강점을 가진 중국은 이미 한국과 일본을 월등한 격차로 추월하여 씨를 말려놓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수년째 중국과 한국은 점유율에서 엎치락뒤치락, 일본은 1,2위 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만년 3등의 위치에서 헤어 나오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먼저 국가의 임금 수준과 조선 산업의 인건비의 개념의 차이 즉, 인건비 계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조선 산업에서 인건비의 차이는 나라 간 임금 수준의 차이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약 10년 전 중국과 한국의 제조업 평균 임금의 차이는 약 7배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배를 짓는 인건비도 7배가 차이가 날까요? 정답은 '아니다'입니다. 배를 한 척 짓는 데 들어가는 인건비는 총 시수(생산성과 반비례)와 시수당 인건비(임금과 비례)의 곱으로 계산됩니다. 즉, 임금은 7배 작더라도 생산성이 3배 낮다면 실제 인건비의 차이는 약 2배 정도밖에 나지 않습니다. 어려우신가요?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집수리 공사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일당은 10만 원인데 5일 만에 끝내준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일당은 5만 원인데 10일 걸린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임금은 절반 가격이라 싸 보이지만 생산성이 낮아 2배의 시간이 들어가니 결국 여러분의 입장에서는 돈(인건비)은 똑같이 들어가고 오히려 공사 기간만 2배가 되는 꼴이 됩니다. 이제 이해가 쉽게 되실 겁니다.

그런 이유로 10년 전의 중국과의 임금 수준은 7배이지만 생산성이 많이 떨어져(한국 대비 30% 수준) 실질 인건비는 약 2배 차이였었고, 현재는 중국의 임금이 많이 올라 한국과의 임금 차이가 3배까지 줄어들었지만, 생산성도 상당히 높아져 (한국 대비 약 70% 수준) 여전히 실질 인건비 차이는 2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0년 동안 두 나라의 조선산업은 내용적으로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는데 인건비 격차는 그대로인 재미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향후 중국과 한국의 인건비 경쟁력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아마도 아래와 같은 내용을 살펴보시면 예측이 가능하실 것 같습니다. '중국 제조업 인건비가 최근 10년 동안 2배가 넘게 올랐다는데, 앞으로 10년 동안은 얼마나 더 오를까?', '생산성은 한국 대비 70% 수준까지 따라왔다고 하는데, 10년 뒤 차이는 얼마만큼 좁혀질까?" 성질 급하신 분들은 벌써 엑셀 시트 열어서 이리저리 계산해보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이러나저러나 결국 인건비가 2배 차이 나니깐 결국 한국의 원가가 더 높다는 것이고 그러니 중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드실 겁니다. 이 부분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선박 제조 원가에서 직접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선종에 따라 다르지만, 대강 약 20% 정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중국이 인건비가 절반밖에 안 된다고 하면 전체 원가 기준으로 약 10% 정도의 경쟁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한국 배와 중국 배의 가격 차이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이지만, 결국 경영의 성과는 이윤이고 배의 가격에서 원가를 제외하여 계산됩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배 가격일 때 원가가 적게 들어간다면 경쟁력이 있는 것이지만, 싸게 만들어서 싸게 팔린다면 그 '낮은 원가'가 경쟁력이 될 수 없습니다.

이 가격 차이는 얼마 정도가 될까요? 이도 시황에 따라 선종에 따라 제각각 이긴 하지만 한국 배는 시황이 나쁠 때는 약 5%, 좋을 때는 약 10% 정도의 프리미엄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즉, 선주들이 중국 배와 한국 배의 가격 차이를 그 정도 인정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런 프리미엄을 받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중고 선박 가격의 프리미엄을 반영한 것입니다. 배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성능은 한국 배나 중국 배가 큰 차이가 없으나 중고선을 거래하는 시점에는 확연히 다르다고 합니다. 중국 선박 대비 내구성이나 성능 유지 측면에서 차이가 나고 이는 고스란히 잔존 가치 즉, 중고 선가에 반영됩니다.

결국 중국 배는 10% 정도 싸게 만들지만 선가도 그 정도 싸니 원가 경쟁력은 크게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독자들께서 요즘 조선업계가 어렵고 그 이유가 선가가 낮아 이윤이 안 나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한 번쯤은 들으셨을 겁니다. 그때 상상의 나래가 펼쳐집니다. "으이그 그러니깐 한국은 인건비가 높아서 안 된다니까? 그래도 중국은 싸게 만드니깐 남겠지만 말이야.." 그러나, 실상은 앞서 제가 말씀 드린 이유로 한국 조선 산업이 어려우면 중국도 어렵습니다. 즉, 한국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다면 중국도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한중일 조선업계가 너나 구분 없이 정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라고 보시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80년대 후반, 일본은 후발 주자인 한국의 공세가 거세지고 인건비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 분하였습니다. 그래서 특유의 노련하고 똑똑한 근성을 발휘하여 이 치명적인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고안해냅니다. 이른바 '표준 선박 대량생산 작전'이 그것입니다. 일본인 특유의 강점인 엄청난 품질 관리능력과, 생산성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전략입니다. 선주들의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킬만한 정말 '잘빠진 표준 선박'을, 마치 자동차 생산을 하듯 라인 생산으로 쭉쭉 뽑아내는 그런 기막힌 컨셉 이었습니다. 결과는 예상대로 획기적이었습니다. 가장 좋은 스펙의 배를 가장 빠른 납기에, 무결점 품질로 심지어는 한국과 비슷한 가격으로 생산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위의 스토리는 결국 해피엔딩이었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단점 극복을 위해 취했던 선택이 나중에 치명적인 '장점의 훼손'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원가절감을 위한 표준선 정책을 시행하면서 많은 고정비를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현장에서는 반복 생산으로 도면은 거의 필요가 없을 정도로 효율이 극대화되었고, 많은 비용이 절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주들의 '세세한 요구사항'은 '표준선 반복 생산'이라는 명목으로 거절되기 일쑤였고, 설비도 표준선에 최적화했기 때문에 새로운 선종을 위한 확장이나 변경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자, 조선소에는 새로운 설계 및 엔지니링을 위한 인력들이 거의 필요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엔지니어링 수요가 줄어들었으니 고정비를 늘리는 신규 인력도 충원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현상이 장기화되자 전국 대학교의 조선과 학생들의 취업문이 좁아지고 조선과에 진학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 일본 조선 산업의 중흥의 상징이었던 동경대학교의 조선해양공학과는 1998년 '조선(Naval Architecture)'이라는 이름을 지우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조선 산업의 사양'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 근원적인 경쟁력을 잃어 가는 길.

한번 훼손된 경쟁력을 복구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일본은 뒤늦게 패착을 자각하고 최근 들어 조선 엔지니어들을 재육성하고, 아베노믹스의 엔저 정책과 장기 불황으로 낮아진 임금을 무기로 다시 한번 조선에서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습니다만 그 길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보통 조선 산업의 경쟁력을 논할 때 원가 경쟁력보다는 제품의 성능, 납기 및 품질 관리능력, 그리고 설계, 생산 기술력을 먼저 얘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답이 보입니다.

선박을 주문한 고객, 즉 선주는 목적이 화물 운송이기 때문에 사업 비용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연료비의 절감, 즉 연비 성능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요새는 환경규제까지 포함하여 사업 운영 리스크가 더욱 커졌기 때문에 사양서에 나와있는 성능은 당연히 만족해야 하고 그 성능을 되도록이면 길게 유지하는 신뢰성 있는 제품이 필요합니다. 또한 선박은 기성품을 사는 게 아닌 주문제작을 하는 것이므로, 내 화물 특성과 주요 루트 및 항구 조건에 최적화되도록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조선소, 그렇게 맞춰줄 수 있는 엔지니어링 능력을 가진 조선소가 선호됩니다. 그리고 배는 주문한 이후 최소 2년이 지나야 받을 수 있는데, 약속된 기간 안에 못 받으면 화주(운송할 화물의 주인) 혹은 용선주(내 배를 빌려 쓸 손님)와의 계약이 깨지거나 큰 손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게다가 운송하는 화물 종류가 가스나 오일, 화학제품 같은 것이라면 배의 결함이나 기능상의 오류로 화물이 유출될 경우, 선주 회사는 큰 위험에 빠지게 되고 천문학적인 보상이 뒤따르는 환경적 재앙의 주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선주들은 되도록 기존 거래를 통해 수년간 검증된 기술과 제작 경험, 능력을 갖춘 조선소를 선호하는 보수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런 보수적인 선주들은 오랜 거래를 통해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거래하는 것을 선호하며, 발주 시 조선소의 기본 역량, 즉 성능, 품질, 납기관리 능력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게 됩니다. 아직은 한국의 조선소들이 이런 부분에서 경쟁국 대비 나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배 가격이 싸고 안 싸고는 이런 기본적인 조건이 만족된 후에 비교 검토되는 두 번째 조건입니다.

현재는 극심한 '발주량 부족'과 '낮은 선가'의 상황으로 조선소들이 극한의 상황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원가 절감'이 다른 경쟁 요소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만 힘든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 인식과, 원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 ‘더 중요한 근원적인 경쟁력을 훼손하면 안 된다’는 원칙 정도는 있어야 하겠습니다. 거북이가 토끼와의 경주에서 이기려고 등껍질을 떼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물에서 싸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조선 산업에서의 경쟁력의 변화는 사실 '기회 이동의 결과’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경쟁력의 차이 때문에 기회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회의 이동(변화) 때문에 경쟁력의 차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즉, 영국에서 일본으로 조선 산업의 패권이 넘어간 것은 '일본이 경쟁력이 좋아짐으로 인해 기회가 일본에 넘어간 것' 이라기보다는 '영국이 제조업을 포기하고 기술 및 금융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 일본이 경쟁력을 갖추게 된 기회가 된 것이고, 한국이 경쟁력이 좋아서 일본을 제치고 조선 강국이 된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일본의 오판과 패착으로 인한 '기회의 이동'이 한국이 경쟁력을 갖게 된 원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떨까요? 한국의 어떤 국가적인 정책의 변화나 한국 조선업계의 오판이나 패착이 중국 등 후발국에게 기회가 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은 이미 진행된 '한국 중소 조선소의 몰락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국 중소 조선소의 몰락'에 대한 내용은 이 후 시리즈에서 상세히 다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야기를 자연스레 따라오시다 보면, '흠 그래, 조선산업은 일단 사양 산업은 아니란 얘기네. 그리고 당분간 한중일 경쟁 체제인데, 일본은 많이 뒤떨어졌고, 중국하고 경쟁에서는 현재 장점을 지킨다면 당분간은 승산이 있겠단 얘기구먼?' 정도로 서둘러 결론을 내신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길한 느낌이 머리를 스칩니다.

'아냐 아냐, 사양산업은 결국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인데, 중국은 이미 선진국의 길로 나아가고 있으니 중국과의 싸움은 잘 버틴다고 해도, 그 뒤로 인도, 남미, 베트남, 미얀마… 신흥국 들이 줄줄이 달려들 텐데 그때는 어떻게 하라고? 에이 깜빡 속을 뻔했네!"

다음 편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