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AKZINE

비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글작성시 입력했던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목록
October, 2019
[산업 현장 이야기] 책상물림의 타향살이

<글 :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 성홍근 책임연구원 hgsung@kriso.re.kr>


‘들어가며 : 또 다시 타향 생활’
필자는 올해 1월 1일자 인사발령에 따라 부산에 설치된 심해공학수조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3월에 조직명이 ‘심해공학연구센터’로 정해졌는데, 편하게는 ‘부산에 있는 크리소 심해수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고 말하고 있다. 소속된 곳의 정식 명칭은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KRISO) 해양플랜트•에너지연구본부 심해공학연구센터’이다. 긴 명칭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옥상옥의 관리시스템에 갇힌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부산에 온지 9개월째이니 생활면에서는 적응을 이제 거의 다 했다. 30년이 넘는 타향살이에 이골이 난 탓도 있지만, 심해수조는 2013년부터, 설계엔지니어링센터 설치사업은 2015년부터 착수하였기에 제 집처럼 부산을 왕래하였기 때문이다. 현장의 가치를 깨달아 오고 있었지만, 최근 9개월여의 기간은 보다 강한 울림으로 일깨워 주고 있다. 모두 다 책상에 앉아 있으면 소는 누가 키우나? 어떤 회사 사장님 말씀이다. 이제 연구소에도 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요 사장님~~
개인적으로는 스무 살에 고향을 떠난 이후 서울에서 12년, 대전에서 19년을 보내고 올해 초부터 부산생활을 시작했다. 이제는 공단지역의 부산함이 대덕연구단지의 고즈넉함보다 더 자연스럽다. 희망하건대 앞으로 15년 정도 이곳에서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달고 짠 부산음식도 이제는 입에 착 붙고, 돼지국밥과 밀면을 자주 먹는다. 덤으로 조선해양업체와 만나기 위한 이동거리도 짧아서 편리해졌다.  
 


<심해공학수조 전경>

 


<고급기술엔지니어링센터 전경>

 
‘책상물림의 유리알 유희’
이곳 부산에 와서 조선해양 분야의 산업과 기술적인 측면에서 대전에 근무하고 있을 때와는 상당한 느낌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 수행한 연구개발이 필자를 포함한 책상물림들의 ‘유리알 유희’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사실상 산업현장의 요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반영하였는지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실감하는 바가 있었다.
대략 2010년경부터 연구소와 대학 등이 주도하여 조선해양산업 발전방향과 실행계획들을 수립한 결과, 대규모로 국가연구개발사업이 조선해양분야에서 실시되기 시작했다. 이 때 시작된 많은 사업들은 최근에 종료되었거나 곧 종료될 것이다. 사실상 각 사업이 나름대로의 성과를 냈지만, 활용성 확대를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는지는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제3자 평가는 당연히 제각각일 수 있고, 앞으로의 추진방향을 정함에 있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절차가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이른바 ‘집단지능’을 발휘해야 한다.

‘총론은 쉽고 각론은 어렵다’
조선(朝鮮)의 멸망에 대한 한 분석자료에서 국가의 법령이 총론은 좋으나 각론에서 세부적인 사항을 정해 놓은 바가 없어 지방관들과 향리들의 재량범위가 지나치게 넓었던 것을 중요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국내에서 해양산업의 발전방향과 계획을 수립하는 데 있어 세부적인 사항을 잘 모르는 필자를 포함한 이른바 제너럴리스트들의 총론 위주의 접근 방식 때문에 핵심적인 디테일을 놓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부사업 기획에 현장전문가들이 더욱 활발하게 참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실은 이전부터 필자가 주장을 했던 내용이다. 그리고 기획전문가들은 현장전문가들을 도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좋은 성과물이 담보될 것이다.

‘중간 생략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2차대전 말미에 일본이 점령한 태평양 군도와 필리핀, 오키나와 등의 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국이 중간 생략 작전으로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해양산업 분야에서 우리가 유사한 방식으로 성공을 쟁취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예스’ 그리고 ‘노우’이다. ‘예스’는 세부적인 장비시스템 기술 단위에서이고, ‘노우’는 생태계적인 측면에서이다. 이웃나라의 한 대기업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되짚어 보면, 수십 년 전에 휴스턴에 작은 사무소로 시작하여 이제는 세계에서 최다 FPSO를 보유하고 해양플랜트 설계엔지니어링은 물론 운영사업을 총망라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스토리를 눈여겨 봐야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장기적인 안목으로 차분하게 업무를 수행하되 적정 시점에 점프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처음에는 너무 서두르지 말자.

‘초심으로 돌아가자’
조선산업의 초기성장은 국가에 의한 발전계획 수립과 전폭적인 지원 덕분으로 평가되나, 이후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것은 조선사들의 뼈를 깎는 노력과 선배 엔지니어들의 성실하게 배우는 자세로 완성되었다. 한편, 해양산업은 조선산업에 비하여 소요되는 시수와 난이도, 공정과 계약관리 측면에서 조선산업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의 역량이 필요함에도, 국내 업계는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도전하였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진단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연구분야에서도 유사한 이유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사업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소를 다시 들일 수가 있으므로.  

‘마치며 – 다시 비상할 수 있을까’
국내 조선소에서 성장한 미들급 엔지니어가 휴스턴으로 이주하여 수석급, 리드급, 매니저급으로 성장한 몇 개의 사례를 본 적 있다. 즉 우리의 문제는 시스템의 문제이다. 사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과거 조선분야 세계 1위를 했던 국가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를 보면 그들은 적절한 시점에 효과적인 방식으로 변화와 혁신을 스스로 만들어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뼈를 깎는 자기성찰은 물론 타인과의 진지한 연합과 협력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 한국인이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다만 지금 이 지점이 고원지대이므로 먼 길을 걸어가야 저 높은 산을 다시 오를 수 있다. 조금 더 힘을 내 보자고 스스로에게 외쳐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