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차 산업 넘나들기
필자는 ‘수학(mathematics)’에 대한 덕업일치를 이뤄보려고 애쓰는, 이 정도는 지극히 평범한 것 아니냐고 자문하지만, 밖에서는 특이하다고 봐주는 데에 스스로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삶으로 인생의 40대를 보내고 있다. 국내 굴지의 조선소 연구부서에 재직하던 30대에도 열변형부터 심지어는 용접결함의 위치와 크기까지도 결정론적으로 계산해보려고 애썼었고, 그 즈음 증명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열광하였으며, 사내 대학에서도 과목을 용접에서 수학으로 갈아타고는 ‘내쉬 균형’ 등의 게임 이론을 줄기차게 강의하였다. 민간에서 순수(?)하게 수학을 즐길 수 있는 몇 안되는 분야가 보드게임이라서, 이 글은 필자가 결국 지금의 보드게임의 메카닉 알고리즘 개발자가 되기까지 겪었던 최근 2-3년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3차산업으로의 진입
‘워라벨’이라는 단어가 뜨기 전부터, 필자는 사실 몸담았던 회사의 덕을 많이 보았다. 보드게임 전국대회에서 몇 차례의 우승을 하는 동안, 회사 내 보드게임 동호회도 만들어졌고, 보드게임 사내전문가로 신입사원 교육에도 나섰으며, 지역사회에도 문화강사 활동을 하면서 은퇴 후 게임작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조선소를 소재로 한 게임을 이리저리 구상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독일에서 ‘Shipyard’라는 게임이 만들어졌는데, 이게 그냥 묻히지 않고 호평과 함께 꽤 팔린 게임이 되어 버렸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 게임은 내가 게임화를 고민하던 블록공법 수준을 뛰어넘어, 자재수급부터 시운전까지를 맛깔나게 다루고 있었다. 시운전을 하면서 고대의 유물을 발견하여 추가점수를 얻는 아이디어는 역으로 건조 과정을 너무도 잘 아는 내게는 감히 생각지도 못할 아이디어로 보였다. 지금 개발에 뛰어들지 못하면 이후엔 머리가 굳어져서 늦을 거로 생각하면서도 실제 감행한 것은 2016년. 그렇지 않아도 최근의 우승했던 몇몇 보드게임 대회의 관련 기사가 나를 두고는 왠 아저씨가 대회에서 초등학생들을 울린다는 식으로, 더 이상 우호적으로 씌여지지 않고 있었기에, 그때는 게이머에서 개발자로의 변신이 필요한 시점인 것은 명확해 보였다. 유럽에서는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보드게임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보드게임의 메카닉 (수학적 알고리즘) 설계자를 통칭 민간 수학자라고 부르곤 한다. 게임의 '메카닉' 이란 쉽게 이야기하면, 개발자는 출판사에 제공하는 게임의 수학적 규칙을 이야기한다. 가상의 예를 들어, 4개를 던져서 2개가 앞면이면 두 칸을 진행하고, 잡을 수 있고, 업을 수 있고... 등의 완결된 규칙을 가져가면, 출판 담당자는 검토 후 "작가님, 지금 우리나라가 한국사 열풍인데, 예전 부여에서는 집에서 기르던 가축들을 도/개/걸... 등으로 불렀다는 군요. 저희가 윷놀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볼께요." 라고 하면서 일러스트레이트부터 스토리라인 등 이후 작업을 일괄 담당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혼자서 모든 것(마케팅 포함)을 다 담당하고 출판사에 제작과 유통만을 부탁할 경우,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이 자사 직원교육자료를 게임으로 제작의뢰하는 경우의 예를 조사해 본 데서 확인한 바로는 약 3천만원 이상의 자부담이 발생한다. 직업으로 이 일을 선택할 내게 이 옵션은 기각. 물론 이 즈음 뜨기 시작한 '크라우드 펀딩' 이라는 방식도 있지만, 알고리즘 개발 이외는 직접 모든 일을 하는 것이 가성비가 너무 없기에 이 역시 기각.
어쨌건 개인적으로도 국내 첫 ‘지속가능한 민간 수학자‘라는 타이틀이 너무도 갖고 싶었다. 당시의 거제에는 조선계에 드리운 어두움을 일부 걷어주기 위하여, 양질의 창업교육이 시스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1기 수강의 이점이었는지, 수도권이었으면 경쟁이 심했을 문화분야에 대하여 생각보다는 손쉽게 창업선도대학 과제의 하나로 선정되어, 재정지원과 함께 보드게임 메카닉 개발을 주제로 창업을 이루었고, 연간 두 차례 정도의 공모전은 꿈을 이루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이내 두 가지가 발목을 잡았다. 하나는 가장으로서 가계의 재정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발된 게임이 공모전의 최종 단계에서 계속 미끄러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임을 수학으로 보는 나와는 달리 문화로 보는 평가자(출판사) 입장에서는 '스토리' 에 대한 방점을 찍지 못한 것으로 본 듯 하였다.
2차산업의 수성
인생에서 '좋아하는 일' 만큼 '잘하는 일' 도 중요하다고 본다. 후자는 소득의 가성비를 책임져준다. 내 시간을 더 쪼개야 하는 이 결정이 더 좋은 게임-메카닉의 결과를 내 줄 거라고 믿었고, 이 즈음 소형 'Floating structure' 를 꿈꾸는 한 창업가와 다시금 제조업의 삶이 일부 시작되었다. 큰 조직에서는 자기 부서업무만 하면 되지만, 작은 회사에서는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만 알았다가 가슴으로 알게 되었다. 제조업을 떠날 수 없는 이유에 가성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설계/해석' 이 주 업무가 되길 바라다가, 이후 새로이 다른 창업가와 시작한 일은 선박용 재료 개발이었다. 그러나 작은 회사란, 대표님의 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사가 나이고 내가 회사인 상황. 산업현장이라는 주제의 본 원고를 처음에는 '제조업 새싹기업의 ABC' 만으로 구상하고 수락했을 만큼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대형 조선소 및 대형 건설회사와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지금에도 사무실은 한 요식업체의 옥상을 빌려 쓰고 있고, 제조공장은 고성 배둔공단길의 한 공장을 임대해서 사용하는데, 태반이 느긋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는 경남 내 숱한 공장 중 하나를 빌리는 것조차, 되지 않는 조건들의 일색이었다. 일찍이 점찍어 둔 회사의 상호는 이후 동명의 한 아이돌 그룹이 국제적으로 성장하여, 명함을 돌리는 것이 뻘쭘하게 되기도 하였고, 업무 협약(MOU)과 매출까지의 갭은 마치 태평양같았다. 시험 인증을 받으려는데 인근의 기관은 몇 달씩 대기가 있어서 3m가 넘는 판을 강원도까지 싣고 가기도 했고, 역으로 시험일정을 쉽게 잡은 연구소와는 우리가 시편 제작 일정을 맞추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도 스스로 성장할 확신이 있는 제조업 창업자들은 다양한 종류의 정부 과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본 재료 기술도 세 번째 정부 과제를 진행하기까지 나름의 좋은 인정을 받으면서, 사업이라는 세계가 단언코 안정화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적절히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제조공장을 넘어 원재료 생산공장까지 준비되려는 지금, 기술보증기금이 선정하는 우수벤처로 지정되었다는 소식도 받았으나, 제조업 벤처는 소회를 풀 일이 없는 곳이다. 회의의 주제는 항상 다음을 다룬다. 혹시 제조업 벤처를 꿈꾸는 젊은 독자님들에게는 일단 기술의 특허 등록을 준비하시고, 중소벤처기업부 사업공고란을 자주 확인하시기를 권고드린다. 스타트업은 IT의 전유물처럼 생각되기 쉽지만, 광역시를 벗어난 '도'내의 스타트업은 여전히 제조업이 대부분이다. 각 지역에서 정부부처와 제조업벤처를 돕는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테크노파크는 당연히 이에 대한 이해가 깊고, 개발자들은 양질의 매우 현실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다.
스토리를 찾아 1차산업으로
수학자 인생을 위하여 제조업이라는 밥그릇도 고이 간직하기로 결심이 선 이후, 나만의 게임 소재를 찾기 위한 방점찍기에 골몰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즈음 내 수학강의를 듣는 학생 중 한 분이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물질(해녀일)을 하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눈에 들어온 수강 공고 '해녀 아카데미'! '조선소'라는 소재의 첫 게임 타이틀은 놓쳤으나, '바다'는 놓치고 싶지 않던 내게, 천식으로 40초도 숨을 참지 못한다는 생각은 잊은 채 원서를 들이밀었다. 120:1 경쟁의 서류통과는 이뤘으나 면접서 탈락한 즈음 해녀 할머니들로 이루어진 조합에서 본인들이 이루려는 이 교육이 잘 알려질 수 있게 재정지원이 가능한 문화사업의 과제기획서 기안을 제안받고, 해녀학교에 특별채용(?) 되어 버렸다.
성씨로 미루어보아 제주도에서 제주에서 건너오셨음을 짐작케하는 50-70대 할머니들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육체적으로 너무나도 힘든 반년간의 물질 수업이 시작되었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던 첫 주에 우리말로 된 물때와 그 계산법 및 원리를 익혔다. 이는 생명과 직결된 것이다. 썰물도 같은 썰물이 아니라 사리(음력 15/30일경)에서는 조석간만의 차가 커지므로, 평소에 해수면 하 10m 정도에 해삼이 잘 캐지는 곳이 있었다면, 이날은 7-8m 만 잠수해도 물건을 캘 수 있는 것이다. 역으로 조금(간만의 차가 작은 음력 8/23일경)때에는 평소 들어가던 곳이 더 깊어지므로, 아예 해녀분들은 이때를 쉬는 날로 삼고 계신다.
생명줄인 태왁(부상시 잡고 있는 부력물체)도 직접 꼬았다. 물숨(자신이 숨을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다가 발생하는 사망사고)을 먹으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삶의 현장. 정말로 성실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태왁을 잡고 있으면 부력 때문에 몸이 U자로 휘어서 수영자세는 나오지 않는다. 처음엔 그 자세로 체력훈련차 약 600m 떨어진 무인도를 왕복하는 연습을 하였다. 이것만 끝나면 좀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은 늘 배신을 당했다. 순수하게 바다에서만 4~5시간 그 전후준비와 관리로 도합 8시간이 걸리는 매일의 일정도 지옥같았지만, 그 삶을 영위하시는 해녀할머니들을 바로 선생님으로 모시고 따라다니는 당시엔 불만을 표출할 방법이 없었다는 게 더 힘들었다. 남는게 없었다면 2주차에 자퇴했어야 하는 것이 상식인 상황. 평생 접할 일 없었던 지식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해삼의 길목을 찾기 위해 해삼이 싼 똥을 살피기, 잡고 나면 몸을 타고 다니는 문어를 다루기 위해 머리를 뒤집어 두기, 바위 형태만 보고도 뒷면의 전복 유무를 짐작하기, 가시로 뒤덮인 성게를 안전하게 잡아올리기...
우리나라의 모든 해안은 주인이 없는 곳이 없다. 심지어 법인인 조선소의 도크들 마저도 밖에서는 몇 도크는 누구 누구꺼 하는 식으로 구역을 맡은 해녀할머니들이 계신다. 어업권은 수심 10m까지를 1종 어업영역으로 지정하여 해녀들만이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보호받고 있고, 해녀가 되는 법은 지역에 따라 선주 혹은 어촌계장의 추천으로 관할 지역에 등록을 하고, 지역별 해녀조합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된다. 선주(해녀배의 주인)는 해녀들이 잡아 온 물건들의 유통을 담당하고, 이익을 해녀들과 적정비율로 나누어 갖는다. 정보에도 밝아야 한다. 거제-통영간 도시가스관이 매설될 때를 비롯해서 해양환경에 반하는 일이 발생시에는 보상금 문제에도 앞장서야 한다.
시간은 흐르고 해녀할머니들과의 1년간의 삶의 결과물은 눈 앞에 놓였다. 해녀들의 목숨건 삶을 주제로 한 게임의 프로토타입이 완성되었고, 처음에 바라던 서울의 대형 게임업체는 해녀라는 소재에 난색을 표했지만, 부산 업체로 옮겨서는 인색하지 않은 평가를 받으며 교육용 게임으로 제작이 시작되었다. 결과물의 부산물도 있었으니, 이 의미도 만만치 않다. 해녀할머니들이 다음의 젊은 세대를 교육시키려는 이러한 열정이 디딤돌의 좋은 하나가 되어, 해녀학교를 졸업하던 2016년 연말 ‘해녀’는 유네스코에 등재되었고, 전 세계에 도서관에 해녀를 소개하는 자료에는 (필자의 작은 사진을 포함하여) 이 교육이 자세히 소개되었다. 해녀들 세계에서는 나름 가방끈이 길었던지라, 한일 해녀포럼의 준비를 돕고, 국립박물관의 해녀 특별전을 학예사분들과 준비하는 등 할머니들께 받은 것의 일부분이나마 간접적으로 돌려드리려고 부단히 노력중이다.
고생이 매력은 아니다. 1차 산업이란 내 결과물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데에 매력이 있다. 지식산업에 종사한다고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는 지금, 살기 위하여 아등바등하던 지난 몇 년을, 본 에세이의 제목을 의식하여 산업 분류별로 마치 타인이 나눠보듯 끄적거려 보았다. 스스로는 기록하지도 않았을 일을 어쩌다 남기고 보니, 자존감이 좀 높아진 느낌이다. 혹시 갓 잡은 해삼 한접시를 앞에 두고 필자와 보드게임을 하면서 제조업 벤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회원분의 연락과 방문은 항상 환영이다.
<글 : BTS 기술부 팀장 하윤석 lunxi@daum.net>